[시론]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준호 국악인

2023년 계묘년을 나흘 앞둔 12월 28일 광안리해수욕장을 찾은 학생들이 토끼 조형물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2023년 계묘년을 나흘 앞둔 12월 28일 광안리해수욕장을 찾은 학생들이 토끼 조형물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계묘년을 맞아 토끼라는 작은 동물을 두고 다양한 문화에서 신화적, 예술적, 민속적 의미의 해석이 분분하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토끼 이미지가 형편없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는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교만함이 넘쳐 쉬엄쉬엄 가다가 지고 마는 영악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는 뚱뚱한 욕심쟁이로 양복을 입고 회중시계를 늘어뜨린 거만한 인물로 앨리스를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 번식능력이 어떤 동물보다 강한 탓에 관능과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 성인잡지의 로고로도 쓰였다.

동양권에서 토끼는 헌신과 희생 공덕의 표상으로 불교 신화와 인연이 깊다. 어느 날 제석천이 걸식하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공양을 받기 위해 여러 동물을 찾아갔다. 토끼는 공양할 것이 풀밖에 없자,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제석천은 토끼의 갸륵한 보시행을 기려 달의 수호자로 삼고 중생들의 표상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영향으로 동양에서는 보름달과 함께 토끼를 다산, 풍요, 번영의 길상으로 여겼다.

계묘년 맞아 토끼 뜻 해석 분분

설화에서 토끼는 서민의 분신

코로나·기후변화·핵·인구 감소

새해에도 약육강식의 위협 산재

재치·유연함으로 위기 극복해야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문화에서 토끼는 착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온 동물이었다. 어릴 때 제일 먼저 하는 노래가 동요 ‘산토끼’였고, 여기에 맞춰 깡충깡충 율동을 배웠다. 과거에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서민 생활에서 토끼는 달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옥토끼의 모습으로 ‘초가삼간 집을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노래 가사같이 배고픔 없이 평화로운 이상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우리나라 전역에 ‘토끼실, 토끼재, 토끼비리, 토산, 토끼봉, 토끼섬’ 등과 같은 토끼와 관련한 지명이 유독 많이 있다.

토끼는 작고 연약한 동물로 사방이 천적으로 둘러싸인 야생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다. 그들에게 대항할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쫑긋 세운 예민한 귀와 동그랗게 큰 눈, 재빠르게 토낄 수 있는 뒷다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비록 힘은 약하지만 영특하고 꾀가 많았다. 수렁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주다 잡아먹히게 된 나그네를 구해 주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고, 나보다 맛있는 것을 소개하겠다고 속여 호랑이를 골탕 먹이기도 한다. 특히 이솝우화에서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당하지만, 우리 토끼는 ‘수궁가’에서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부려 거북이를 따돌린다. ‘범 내려온다’라는 대목도 별주부가 “토 생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발음이 새어 “호 생원”이라 부른 데서 생긴 소동이다.

설화에서 호랑이, 용왕, 거북이는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과 양반의 상징이고, 거북이는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벼슬아치의 모습이고, 호랑이의 담뱃대를 들고 있는 척하는 익살스러운 토끼는 서민들의 분신이었다. 설화는 오랜 세월을 통해 전승한 민족적 사상과 가치관을 함축시켜 놓은 것이기에, 단순히 동물의 모습으로 세태를 풍자한 우화로 치부하기에는 섬뜩한 깨우침이 담겨 있다. 계묘년 한 해도 역시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여전히 토끼를 노리는 거북이와 호랑이들이 사방에 득실거린다.

‘아직도 창궐 중인 끝나지 않은 코로나’ 호랑이도 있고, ‘폭염, 홍수, 가뭄, 산불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라는 호랑이도 있다. 그리고 ‘2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라는 호랑이와 ‘더욱 치열해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군비 경쟁’이라는 호랑이도 있다. 또 ‘그 틈을 타고 첨예한 대치로 핵 위기를 확산하는 한반도 정세’라는 거북이도 있고, ‘간사한 꾀로 이웃 나라 영토를 노리는 열도’ 거북이도 있다.

그리고 국내의 ‘꼬인 실타래 같은 정치 상황’과 ‘경제적 동력 상실’, ‘사회적 대립과 갈등’, ‘인구 감소’ 등도 우리를 언제 삼킬지 모르는 강력한 호랑이와 거북이다. 설화에서 토끼는 거듭 닥쳐오는 부당한 위협과 요구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재빠른 재치와 대처 능력을 발휘하여, 호랑이와 거북이를 농락하고 그 고비를 극복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