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6. ‘테라코타 사랑’ 근대 조각 선구자 권진규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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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세계에 대한 이해, 생략에서 드러난 ‘이순아’의 본질

권진규 '이순아'(1968,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권진규 '이순아'(1968,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1922~1973)는 이중섭, 박수근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역경을 겪었다. 생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아 생활고와 함께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권진규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고, 사후에 독창적 예술세계와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재조명됐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1945년 함흥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1947년 이쾌대가 세운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이쾌대의 지도 아래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9년 도쿄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학과에 입학했고, 조각의 세계에 눈을 떴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권진규는 조각가 로댕과 부르델의 맥을 이은 시미즈 다카시를 사사했다. 권진규는 대학 근처에 있는 묘석상 석공들로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석 조각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브론즈로 조각하던 시미즈 다카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알려진다.

일본 유학 시절 권진규는 석고, 브론즈, 석조 등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며 작품을 제작했다. 귀국 후 ‘한국 정통성에 대한 현대적 계승’을 고민하며 테라코타와 건칠 작업에 주력했다. 특히 권진규는 테라코타를 사랑했다. 당시 한국 조각계에서는 금속 용접 조각이 유행했다. 하지만 권진규는 유행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재료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권진규 '마두'(1965년경,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권진규 '마두'(1965년경,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테라코타는 ‘구운 흙’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구웠을 때 단단해지는 점토의 성질을 이용해서 만든 조각·건축 장식 등을 말한다. 테라코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애용되어 온 조각 기법으로 고대 무덤, 벽 장식, 부장품 등에 활용됐다. 권진규는 테라코타가 지닌 성질의 영원성에 주목했다. 권진규는 자신의 명함에 ‘테라코타 권진규’라고 적어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테라코타에 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소재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애정도 느낄 수 있다.

권진규를 대표하는 또다른 기법인 건칠은 불교에서 불상을 제작할 때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보통의 건칠은 매끄러운 표면을 가지고 있지만, 권진규는 거친 삼베의 자국을 그대로 남겨 조각에 담긴 인물의 고독·정신성을 대담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건칠 기법으로 권진규는 테라코타가 지닌 단단함이나 정신성과는 사뭇 다른 표현 방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완성한다. 이는 작가의 심리 상태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 권진규는 여성 두상과 흉상을 다수 제작했는데, 그는 자신을 비롯한 주변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 권진규는 “모델의 내적 세계가 투영되려면 인간적으로 모르는 외부 모델을 쓸 수 없으며 ‘모델+작가=작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라고 말했다. 모델의 내적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강조한 말이다.

1967년 권진규는 미술평론가 유준상의 소개로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 이순아를 알게 된다. 그는 이순아에게 작품 모델을 의뢰했다. ‘이순아’(1968)는 테라코타가 지닌 영원성과 함께 얼굴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과감한 묘사 생략이 대상의 본질에 주목하게 만든다. 길게 뻗은 목과 정면을 응시하는,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에서는 모델과 작가의 정신성이 느껴진다.

권진규 '검은 고양이'(1963,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권진규 '검은 고양이'(1963, 가나문화재단 소장).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동물상 역시 권진규가 즐겨 작업한 소재이다. 작가는 ‘마두’ 시리즈부터 고양이, 닭, 소, 개 등 다양한 동물을 조각했다. 권진규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고양이·개 등과 생활하며 이들의 움직임과 형상을 관찰했다. 동물 사진을 촬영한 다음, 스케치로 옮겨 다시 작품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1963)는 고양이의 형태가 절묘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고양이 조각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고양이를 빚은 작품인데, 쭉 뻗은 두 앞발과 등의 근육에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함께 바짝 치켜올린 꼬리가 마치 살아있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김경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정리=오금아 기자)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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