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48시간 발 묶어 낙동강 방어선 구축 시간 벌어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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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 대전지구전투

7월19~20일 이틀간 사투 벌여
인명피해만 1150여 명에 달해
로켓포로 북한군 전차 첫 파괴
패배 아닌 전략적 승리로 평가

1950년 7월 20일 미군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그해 7월 19일부터 이틀간 치열하게 전개된 대전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소중한 시간을 벌어 줬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1950년 7월 20일 미군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그해 7월 19일부터 이틀간 치열하게 전개된 대전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소중한 시간을 벌어 줬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공

대전지구전투는 1950년 7월 19~20일 단 이틀간 벌어진 전투였다. 하지만 인명 피해는 1150여 명에 달했다. 투입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준다.

대전전투는 6·25 전쟁 발발 후 대전지역 최초의 방어전투였다. 전쟁 초기 거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 ‘패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6·25 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 대전을 지나 남진을 계획했던 북한군을 며칠 동안 대전에 묶어 두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 등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대전시는 지역 군부대가 하던 대전전투 전승 기념식을 2016년부터 시 주관 행사로 전환해 열고 있다. 2016년에는 대전전투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도 건립했다.


■전쟁의 서막, 19일 새벽

1950년 7월 3일. 한강을 넘은 북한군은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과 처음 전투를 치렀다. 미군 24사단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대전에 집결했다. 미군 24사단에 내려진 임무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예정인 제1기병사단이 영동 부근에서 반격 준비를 마치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미군 24사단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주력 34연대를 유성에서 갑천을 건너 대전 시내에 이르는 길목인 월평산성 쪽에 배치했다. 또 영동에 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의 수색중대를 대전으로 이동시켜 지원하도록 하는 등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북한군의 대전 공격은 19일 오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북한군은 야크 전투기와 전차로 대전 외곽을 공격하면서 일부 부대를 대전~옥천 사이의 요충지로 침투시켰다.

야크 전투기가 옥천 인근 철교와 대전비행장을 폭격한 데 이어 북한군 제4사단 5연대는 유성 방면에서, 제16연대는 논산 방면에서, 3사단은 금강을 건너 대평리에서 대전으로 진격했다. 가수원동과 정림동, 유천동, 월평동과 계룡로, 서대전네거리 등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

■대전 시내 뚫린 20일 새벽

북한군이 전날에 이어 20일 새벽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자 미군 24사단은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오전 3시쯤 북한군 전차와 보병이 유성 방면에서 공격해 오면서 미군 34연대 1대대 방어 진지를 통과해 후방으로 이동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는 끝내 철수했다.

통신 두절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딘 소장과 34연대장은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며 대응하는 등 분전했다. 적의 전차가 파괴됐지만 일부는 시내로 진입해 휘젓고 다녔다. 서남쪽을 방어하던 미군도 밤새 전투를 했지만 오전에 정림동 고개를 내 줬다.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를 보인 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물러나려던 미군은 후퇴 과정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철수 시기가 늦어진 탓에 대전 후방은 우회 공격한 북한군에 의해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대전 시내 전역을 수중에 넣었고, 이미 금산과 옥천으로 향하는 도로까지 진출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려던 미군은 판암동과 세천터널을 장악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금산 쪽 도로를 지나다가 인민군 매복에 걸려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병력 열세와 지휘계통 붕괴, 퇴로 차단으로 인한 혼란이 겹치며 미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날 오후 미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금산과 옥천으로 빠져나가면서 전투가 끝났다.

대전전투에 참전한 미군 3933명 중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94명 등 모두 1150명이 피해를 입었다. 전투장비도 65%나 잃었다. 그 과정에서 딘 소장은 퇴로를 잃고 헤매다 북한군에 잡혀 3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패배가 아닌 ‘전략적 승리’

대전전투 패배 후 미군은 병력의 3분의 1을 잃었고, 북한군은 사로잡은 미군 포로 상당수를 즉결 처형했다. 대전은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67일간 북한군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처럼 대전전투는 많은 희생을 기록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패배로 기록하지 않는다. 48시간 동안 격렬하게 치른 대전전투가 있어 미군과 한국군이 후방에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대전에서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지휘체계를 정비할 시간을 얻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게 됐다. 미군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투입돼 낙동강에 저지선을 펴도록 시간을 벌어 주기도 했다. 이에 대전전투는 오늘날 전략적인 승리로 재평가되고 있다. 대전 서구 보라매공원에는 대전지구전투 당시 대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미군 전사자 명단이 기록돼 있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전쟁의 상처와 희생정신은 곳곳에 녹아 있다.

대전일보=정민지 기자 zmz1215@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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