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란 가공업체가 구술사 책을 낸 이유는?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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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푸드, 설립 30주년 맞아 '여사님들' 발간
명란 가공공장 여성노동자 8명 생애사 담아
'조선명란' 탄생시킨 숙련 노동자 조명 의미


덕화푸드에서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애사를 담은 책 '여사님들'이 2월 출간된다. 산지니 제공 덕화푸드에서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애사를 담은 책 '여사님들'이 2월 출간된다. 산지니 제공
덕화푸드 공장에서 명란을 다루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부산일보 DB 덕화푸드 공장에서 명란을 다루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부산일보 DB

부산에 본사를 둔 명란 가공 기업 '덕화푸드'가 '알' 대신 '펜'을 들었다. 업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애를 담은 책을 발간하기 위해서다.

덕화푸드는 설립 30주년을 맞아 2월 중순 '여사님들, 수산제조 여성 노동자들의 생애 구술사'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31일 밝혔다. 책에는 명란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8명의 생애사가 담긴다. 저자로는 독립연구가이자 덕화푸드의 CBO(Chief of Brand Officer·브랜드 이사)이기도 한 김만석 이사와 신민희 독립연구자, 권명아 동아대(한국어문학과 교수) 젠더·어펙트연구소장이 참여했다. 이 작업은 동아대의 푸드문화지리 기획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기업의 설립 행사때는 으레 기업의 성과를 자랑하기 마련이지만, 덕화푸드는 묵묵히 기업을 지켜온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명란은 섬세하게 알을 골라 막을 걷어내고 성형까지 하는 전 과정에 고도의 수작업이 필요하다. 수산물 가공이 모두 기계화돼 있을 것이라는 일반 상식과는 달리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노동자들은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쌓인 노하우로 명란을 3단계로 선별하고, 아주 얇은 껍질을 알 손상 없이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 크기와 상태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명란의 가격이 가공 노동자들의 손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화푸드가 노동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유다.

덕화푸드가 한국식 명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발효젓갈 형태의 '조선명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숙련된 노동자들의 공이 컸다고 회사는 설명한다. 덕화푸드는 수당과 별개로 매년 이윤의 일부를 가공 작업자들과 나누고 있다.

덕화푸드뿐 아니라 모든 여성 수산가공 노동자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것도 책의 출발 배경이다. 명란을 포함해 부산에서 생산되는 모든 수산가공품은 수십 년간 부산 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그 배후에서 묵묵히 업계를 떠받쳐 왔으나, 이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게 덕화푸드의 설명이다.

책에는 부산의 핵심 산업이었던 의류·신발업계를 거쳐 명란공장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 어묵공장에서 일하다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 사연 등 부산 수산업 여성들의 생생한 생애가 사투리로 펼쳐친다.

명란 가공 공장에서 생애사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공장 작업자를 비롯한 직원들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김만석 이사는 전한다. 노동자들의 생애를 담는 작업이 단기적인 매출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같이 있는 사람들이 역사가 된다'라는 믿음을 직원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는 작업자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지만, 회사가 인터뷰를 위해 선뜻 시간을 내 준 덕분에 책을 낼 수 있었다.

김 이사는 "깡깡이, 자갈치 아지매, 여공의 노동과 함께 식탁을 함께 만들어온 이들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취지였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들의 역사가 우리 브랜드의 가치를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것이고, 소비자가 이를 가치로 소비하게끔 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식탁을 차려주는 엄마를 기억하는 것처럼 여사님들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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