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 한·일 민간 협력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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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취재 국내 안치 희생자 유골 첫 확인
얽힌 과거 역사 풀고 미래 여는 계기 되길

국내에서 처음으로 우키시마호 참극 희생자 유골이 확인돼 진상 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1945년 우키시마호 침몰 장면. 부산일보DB 국내에서 처음으로 우키시마호 참극 희생자 유골이 확인돼 진상 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1945년 우키시마호 침몰 장면. 부산일보DB

부산 영락공원에 수십 년 유골로 방치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희생자 가운데 ‘우키시마호’ 참극의 피해자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의 한·일 합동 취재를 통해서다. 〈부산일보〉가 찾은 영락공원 무연고자 유골 현황과 〈서일본신문〉이 입수한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을 대조한 결과 영락공원의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 194구 중 최소 12구가 우키시마호 침몰 피해자로 확인됐다. 이 배경에는 한·일 양국 시민단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오랜 노력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국가가 손 놓고 있었던 우키시마호 유골을 한·일 간 민간 협력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2일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태우고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출항한 ‘1호 귀국선’이다. 해방과 귀향의 기쁨을 안고 부산으로 향하던 귀국선은 다시 일본으로 뱃머리를 돌린 후 출항 사흘 만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침몰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희생됐다. 일본의 고의 폭침 등 숱한 의문이 남았지만 한·일 정부의 외면 속에 방치된 비극이 되고 말았다. 한국인 8000명 이상이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80년 가까이 희생자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유골들은 일본 현지와 국내에 뿔뿔이 흩어져 원혼마저 달랠 길이 없었다.

이번에 찾아낸 12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유골이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은 1970년대 세 차례에 걸쳐 241구가 한국에 들어왔으나 별도 표기 없이 다른 강제징용자 유골과 뒤섞여 있었고 우리 정부는 추적조사 없이 방치했다. 늦었지만 이번 희생자 유골 확인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강제징용자 유골에 대한 전수조사 필요성이 제기된다. 일본에 있는 유골에 대한 봉환도 하루빨리 이뤄져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 공간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희생자 유가족과 한·일 시민단체의 요구다. 그나마 일본 마이즈루 현지 주민들이 수십 년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골 보존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번 유골 확인은 한·일 간 민간 협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한·일 관계 경색으로 정부 간 현안 해결이 어려울수록 민간 협력이 더 중요하다. 때 맞춰 주말 3년 만에 재개된 ‘부산-후쿠오카 포럼’도 한·일 간 민간 협력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시킨 장이었다. 이날 양 도시 참석자들은 2030 부산월드엑스포 지지를 함께 선언하는 등 결실을 거뒀다.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이 이 포럼을 주도하고 있는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의미를 더하는 일이다. 한·일 간 민간 협력이 과거사의 얽힌 실타래를 풀고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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