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최정예 6사단 폭주 막아선 숨은 전사, 호남 경찰과 학도병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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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 호남전투

병력 부족해 군경 합동부대 급조
금강 저지선 구축 지연작전 나서
곡성경찰 보름간 치열하게 항전
학도병 180여 명 혈서 쓰고 모여
전황 나빠 훈련 9일 만에 전선 투입
화개장 전투 맹활약 북 진출 늦춰

1950년 전남 곡성경찰서 전투경찰 대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곡성 경찰은 500여 명의 전투경찰 대대를 편성해 태안사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쟁기념관 제공 1950년 전남 곡성경찰서 전투경찰 대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곡성 경찰은 500여 명의 전투경찰 대대를 편성해 태안사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쟁기념관 제공

6·25 한국전쟁 당시의 ‘호남전투’는 지난 70여 년간 시선을 끌지 못했다. 북한군 진입 이후 11일 만에 호남지역을 빼앗겼다는 이유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불독’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정예 6사단이 호남에서 수일간 시간을 보낸 덕에 부산을 방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호남에서 유례없이 신속하게 이동하던 북한군 6사단의 진군에 맞선 ‘지연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호남 전투경찰과 혈서를 쓰고 지원한 학도병이 바로 그들이다.


■‘파죽지세’ 북한군 6사단

방호산 사단장이 이끈 북한군 6사단(6사단)은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였다.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가진 병력에다 최신형 장비까지 보유했다.

6사단 예하 부대들은 7월 6일 평택, 7월 8일 천안을 거쳐 전투력 손실 없이 서해안을 따라 기동했다. 6사단은 목포항과 여수항 등 서해안 일대로 우회해 호남지역을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6사단 선두부대가 호남지역을 처음 공격한 것은 7월 16일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호남에는 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수도 방위에 나서 호남지역에는 국군 병력이 전무했다. 결국 충청, 호남 지역 전투경찰과 해병대원 일부, 징집자 등으로 급조한 군경 합동부대인 ‘7사단’을 꾸렸다. 하지만 총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름만 사단이었다.

북한군 6사단이 밀고 들어오자 7사단장 민기식 대령은 육군본부에 수차례 무기와 탄약 등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민 대령은 예하 2개 연대의 후방 이동을 건의하고, 사단사령부 요원을 포함한 1개 중대 규모만으로 지역 방어에 나섰다.

■호남전투 중심은 전투경찰

전쟁이 나자 전남·전북 경찰국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력을 전투부대로 개편했다.

국군과 미군 그리고 경찰은 금강 저지선을 구축해 방어에 나섰다. 7월 16일 밤 호남경찰은 충남 양촌에서 첫 전투를 시작한 뒤 장항전투, 강경 수복전투를 치르며 지연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병력 증원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익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호남 전투경찰은 만경강 일대에 국군과 함께 조촌(만경강)방어선을 구축했다. 7월 19일 김제경찰서 대원들은 막강한 전력을 가진 북한군 6사단과 벌인 청하전투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정읍, 순창을 거쳐 광주로 남하했다. 7월 23일 광주 산동교에서 경찰과 국군은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영광 삼학리에서는 영암, 화순 등 인근 지역에서 차출된 경찰관들이 북한군 6사단과 지연전투를 벌이다 대부분 전사했다.

북한군은 전차와 중무기를 앞세워 광주와 전남 서부지역을 점령한 후 동쪽으로 진군했다. 호남지역 대부분이 점령된 상황에서도 곡성 경찰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지 않고 지역을 사수했다. 북한군은 전투경찰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7월 16일 공격을 시작해 7월 31일이 되어서야 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국 위해 나선 어린 학생들

1950년 7월 25일 ‘화개장 전투’는 6·25전쟁에서 전남지역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이자 북한군의 하동 진입을 지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다급해진 국군 5사단 15연대는 7월 13일 여수·순천에서 학도병을 조직했다. 사나흘 만에 호남 학생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고 여수·순천·광양·벌교·보성·강진 등지에서 모였다. 학도병으로 자원했던 학생의 출신 학교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17개 고교에서 180여 명이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전훈련을 하지 않은 학도병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릴 정도로 호남지역의 전황은 계속 악화됐고, 결국 학도병들은 9일간 훈련을 마친 후 손에 소총 한 자루만 쥐고 전선에 투입됐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철모 대신 교모를 쓰고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싸운 70여 명의 소년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에는 이들 호남 호국영웅의 희생을 기리는 순천 호남호국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정병호 광주일보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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