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화권’ 이룬 우리 역사의 원천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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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5. 살아 있는 가야

가야 고분군 중에서 잃어버린 가야사의 위용을 맨 처음 다시 드러낸 부산 복천동 고분군 모습. 문화재청 제공 가야 고분군 중에서 잃어버린 가야사의 위용을 맨 처음 다시 드러낸 부산 복천동 고분군 모습. 문화재청 제공

1970년대 이후 발굴·실체 확인

지리적 위치와 해상 교류 통해

고대 ‘동아시아 지중해’ 속성


“일본 모즈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양국 우호 증거 가야도 올라야”


가야는 562년 멸망했으나 늘 살아 있었다. 각 시기의 나라가 흔들릴 때, 우리 역사를 다시 추스를 때 가야는 살아났다. 통일신라를 만들어낸 주역은 가야계 김유신이었는데 그는 9세기 초 김헌창의 난 직후 가야를 아우르는 ‘삼국일통(一統)’의 상징으로 흥무대왕에 추봉됐다. 가야는 후삼국 때 지역적으로 재생됐고, 고려 정변기와 몽고항쟁기에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다시 살아났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우리 역사의 원천으로 탐구했고, 일제도 굴절시킨 임나로 불러냈다.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발굴을 통해선 눈앞의 역사적 실체로 다시 살아났다. 600년 역사의 가야가 오늘의 역사로 다시 깨어났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비화가야를 망라한 가야 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내다보고 있다.

가야는 해상 교류에 의해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 문화권, 동아시아 세계를 처음 형성했다. ‘나라의 철이 유명해서 한(韓)·예(濊)·왜(倭)와 낙랑·대방군에도 공급했다’(<삼국지>)고 했다. 선사시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온 교류가 새로운 단계로 격상한 것이었다. 그것은 낙랑의 견제를 덜 받는 ‘절묘한 지리상 위치’,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탁월한 자연적 조건’으로 가능했다. ‘늑도 교역’과 ‘김해 교역’(양동리-대성동)의 진화 단계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지중해’가 숙성해갔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역동적이었다. 중국 낙랑 유민이 남하했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걸쳐서도 ‘안’과 ‘밖’, ‘우리’와 ‘남’이 다양하게 공존했으며 서로 뒤섞였다. 가야 지역과 북부 규슈 곳곳에는 바다 건너 사람들이 오가며 뒤섞여 살았던 국제 마을이 산재했다. 그것이 당시 동아시아 지중해, 국경 없는 고대사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는 국경을 고집하는 오늘날에도 쉬 성취하기 힘든, 그래서 미래 지향적으로 추구해나가야 할 모습의 하나일 터이다.

가야의 모습 자체도 대단히 역동적이었다.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을 모태로 각각의 분지에서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했고, 그 일부는 주변을 좀 더 넓게 아우르면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경남 대부분과, 경북 고령 일대, 전라 동남부에 이르는 그곳에 그토록 많은 소국들이 자치성을 가진 채 호혜의 정치 네트워크를 이루며 공존했다는 것은 지방자치의 오늘날 관점에서 봐도 가히 대단하다. 더욱이 그 가야 제국(諸國)들이 이를테면 토기의 경우, 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비화가야 양식이라는 저마다의 독자적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 곳곳이 그만큼 자율적이고 역동적인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역동성이 지금도 이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들의 혈류 속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호명되는 ‘살아 있는 가야’의 한 모습일 것이다.

‘금동관’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철제 갑주’ 등 보물을 쏟아낸 복천동 11호분. 문화재청 제공 ‘금동관’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철제 갑주’ 등 보물을 쏟아낸 복천동 11호분. 문화재청 제공

동아시아 지중해의 관계망 속에서는 각축이 필연적으로 벌어졌다. 313년 낙랑 멸망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아울러 ‘백제-가야-왜’ ‘고구려-신라’의 양대 축이 점차 부상하고 조정되기도 했다. 특히 400년 고구려의 남정 이후 타격을 받은 금관가야의 주요 세력은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대거 일본열도로 넘어가기도 했다. 바야흐로 5세기 초엽 일본열도는, 야요이 초창기 이후 제2의 도래인 시대를 맞았다. 일본열도의 기술혁신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5세기는 일본열도의 고대사가 촉진된 이른바 ‘왜 5왕의 시대’(413~502)로, 왜 왕권이 10여 차례에 걸쳐 중국에 조공을 보낸 시대였다. 왜 왕권은 외교관계를 다각화하면서 가야 각국뿐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도 더 넓혀갔다.

아니 백제로 그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편이었다. 562년 가야가 멸망했고, 이후 100년간 대체로 백제와 왜의 우호적 관계는 지속됐다. 가야를 통해 열린 고대 동아시아 지중해 역사, 동아시아 해역사(海域史)에서 하나의 큰 시대를 구획한 역사적 사건은 백제 부흥전쟁인 663년 백강전투였다. 백강전투는 백제부흥군-왜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의 싸움이었다. 백강전투에 왜는 2만 7000명의 원군을 보냈다. 이를테면 그것은 ‘백제-가야-왜’ 축에서 가야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축이 동아시아에 작동한 것을 보여준다. 백강전투는 기원전 1세기 가야 지역의 ‘늑도 교역’에서부터 시작해 대략 800년 정도 이어진 동아시아 해역사의 한 시대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백강전투 이후 많은 백제 유민들이, 400년 금관가야 사람들처럼 일본열도로 망명했다. 신라는 676년 당나라와의 전쟁을 거쳐 통일신라로 비약하는데 이를테면 7세기는 당과 일본까지 해전에 참전한, 동아시아 지중해의 격동 시대였다.

향후 반세기 동안 한·중·일 각국은 자기 역사를 추스르는데 일본이 680년부터 시작해 720년 <일본서기>를 완성한 것은 그 흐름의 하나였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 썼다.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가야 시대와 나란히 하는 일본 오사카의 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 학자들은 “양자의 관계성은 매우 강하다”며 “가야 고분군도 함께 등록돼 한·일 우호의 증거로서 그 역사적 의의를 세계적으로 표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강력히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살아있는 가야’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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