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98.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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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팀장

‘반기문은 이번 방한에서 JP를 만나 충청대망론을 환기시키고 안동에서 류성룡 선생을 부각시키는 언행을 하면서 영남 민심을 자극했다. 만약 이 같은 행보가 대선을 지역연합 구도로 치러 보겠다는 내심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면 그 사고의 폭과 수준에 심히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때문이다. 딱 4글자 ‘걱정된다’면 충분했을 것을 장장 18자로 늘렸으니…. 이렇게 글을 질질 늘어지게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글에 자신이 없기 때문일 터. 그러니, 자신 있는 글을 쓰려면 아래처럼 쓰지 않는 게 좋겠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수백 년이 지난 만큼 19세기 영국처럼 성탄절을 새롭게 조명할 때가 아닌가 한다.→…새롭게 조명할 때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수필을 논하며 파격이라는 단어를 다음 같이 썼는데 그 파격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예술을 만든다.

*추세를 역행하여 거래하는 것은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더 노력해야 한다.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복권시키기 위해 구색맞추기 식으로 김경수 전 지사의 사면을 끼워 넣은 것에 다름 아니다.→…끼워 넣은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짧아지면 글은 오히려 힘이 더 세진다. 이 밖에도, 글을 짧게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10여 명의 사람들이→사람 10여 명이

‘사과 100개, 감 50개’처럼, 명사 다음에 숫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말법이다. 토씨 ‘의’도 일본어 냄새가 많이 나므로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게 좋다. 또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3년 만에 대면 행사로 진행되는 만큼 이날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예상된다.

요즘 우리말에는 ‘~고 있다’라는 진행형이 쓸데없이 넘쳐 난다. ‘먹고 있다/가고 있다’처럼,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면 진행형 ‘~고 있다’는 피해야 한다.

*대형차에 1600cc 엔진을 장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모자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입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주택을 이야기합니다.

이 문장들에선 ‘했음에도 불구하고’가 결점이다. ‘했음에도’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굳이 습관처럼 ‘불구하고’를 붙여 글을 질질 늘이는지 모를 일이다.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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