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리포트] 한국 법원 “베트남전 학살 책임” 판결에 해외서도 “과거사 직시”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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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 가족 잃은 피해자 재판
각국 언론들 판결 앞다퉈 보도해
유사한 줄소송 부를 것으로 전망
베트남 정부, 이번 사안 거리 둬
양국 경제 상황 고려했다는 분석
진실 외면하면 한·베 관계 불안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63) 씨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한민국 상대 민사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63) 씨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한민국 상대 민사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해외 언론은 한국 법원이 내린 기념비적인 판결에 주목했다. 법원이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부산일보 지난 8일 자 10면 보도)한 것이다. 외신과 이 문제를 연구한 베트남 인사들은 이번 판결이 유사한 소송을 부를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과거사 문제를 매듭 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만 베트남 정부는 정작 이번 판결과 거리를 두는 듯한 입장을 취해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책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배상 책임이 한국 정부에 있다고 한 판결을 전 세계 다양한 언론사가 보도했다. 베트남 매체 베트남인사이더를 비롯해 영국의 로이터통신, 미국 AP통신, 뉴욕타임스, 중동권 매체 알자지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MC) 등이 한국 법원 판결을 비중 있게 다뤘다. 뉴욕타임스는 “베트남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 피해자들이 한국에서 유사한 소송을 제기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면서 “한국 국회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며 원고 응우옌 티탄(63) 씨의 변호사 말을 인용했다.

AP통신은 “그동안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연계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면서도 “일부 전문가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 민간인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다만 “이와 같은 잔학 행위는 한국의 투자로 경제가 성장 중인 베트남과 한국의 공식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인사이더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 외무부는 이번 판결에 대한 논평 요청에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또 베트남 외교부는 지난 9일 정례 브리핑에서 예상 밖에도 차분한 어조로 이번 사안을 평가했다. 도안 칵 비엣 외교부 부대변인은 “한국 법원의 판결은 55년 전 꽝남성에서 벌어진 퐁녓·퐁니 학살과 관련된 것으로 20세기 후반 베트남 일부 지역에서 외국 군대가 저지른 많은 학살 중 하나”라며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양국의) 포괄적·전략적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외교부의 브리핑을 분석하면 이번 문제는 한국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사실 베트남 정부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과와 배상을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한 적이 없다. 최근 외교부 브리핑에서도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의 공식화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정황도 발견된다.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한국에 처음 알린 것으로 유명한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는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다. 정부가 소송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 한 마디에 원고가 소송을 중단할 수도 있다”면서도 “지난 4년 동안 베트남 정부는 소송에 개입하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베트남 정부의 속내는?

이 문제에 유독 과묵한 베트남 정부의 속내는 무엇일까. 구 이사는 복잡다단한 베트남 내부 사정 때문인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얽혀있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가 다른 참전국과의 외교 관계에 끼치는 영향도 고려했을 것이다”며 “특히 무력으로 통일을 완성한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과거 전쟁의 상처를 파헤치는 것보다 내부 통합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고 말했다.

AP통신이 지적한대로 두 나라의 경제적인 요인도 이 문제와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싱크 탱크 ISEAS-유소프 이삭 연구소의 루옹 디엔 방문연구원은 지난해 12월 미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글 ‘한국이 베트남에서의 만행을 인정할 때이다’에서 이를 짚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고엽제 문제 등 베트남 전쟁의 유산을 10년 이상 취재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루옹 연구원은 “베트남은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가장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했고, 한국은 베트남의 가장 큰 외국인 직접투자 국가다”면서 “양국은 2021년 807억 달러에서 2023년 1000억 달러, 2030년에는 1500억 달러로 양자 교역을 확대할 계획이다”고 썼다.

루옹 연구원은 “한국의 다국적 기업인 삼성은 또한 베트남에서 가장 큰 단일 외국인 투자자로서 수출 지향적인 베트남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삼성은 베트남의 6개 공장에 약 180억 달러를 투입했으며, 수년 동안 베트남에서 스마트폰의 약 절반을 생산해 베트남 전체 수출의 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 삼성의 최근 베트남 생산 축소는 베트남 스마트폰 수출에 타격을 줬다”고 강조했다.

루옹 연구원은 역사 외면이 결국 두 나라 관계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부산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진정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 부분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의 항소 준비에 대해서는 “지난해 12월 한국과 베트남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양국 관계를 격상한 상황 속에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두고 이를 악물고 싸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답변했다.

그는 이 문제가 일제강점기 때 희생당한 한국인 문제와도 유사하다고 봤다. 한국이 일본에는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베트남 희생자를 외면하는 것은 ‘이중 잣대’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한국·베트남 관계는 물론 일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루옹 연구원의 지적은 다양한 시사점을 던진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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