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년 전 '부산의 유관순'들 다닌 일신여학교 아직 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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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부산 원도심 역사기행

부산지역 최초 3·1 운동을 이끈 부산 동구 좌천동 '부산진일신여학교'. 1919년 당시엔 1층 건물이었고, 2층은 1931년 증축했다. 정대현 기자 jhyun@ 부산지역 최초 3·1 운동을 이끈 부산 동구 좌천동 '부산진일신여학교'. 1919년 당시엔 1층 건물이었고, 2층은 1931년 증축했다. 정대현 기자 jhyun@

어김없이 순환하는 4계절, 그중에서도 매년 봄을 깨우는 존재가 있다. 봄비, 봄꽃, 그리고 3월의 첫날인 ‘삼일절’. 너무 익숙해 지나치기 쉬운, 어느덧 100주년을 훌쩍 넘긴 국경일을 맞아 가까운 우리동네로 역사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부산의 근현대사가 켜켜이 쌓인 원도심에 가면, 항일·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 3·1 운동의 시발점

부산 동구는 부산지역 3·1 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3번 출구를 나서면 지역의 항일정신이 서린 장소를 연결하는 ‘부산포 개항가도’가 나타난다.

바닥과 벽면의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골목을 오르면 붉은 벽돌과 검은 기와의 서양식 건물이 등장한다. 호주 선교사들이 설립한 부산·경남지역 최초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일신여학교)다. 1895년 좌천동 한 초가집에서 개교한 일신여학교는 1909년 서양식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일신여학교는 외벽 벽돌과 내부 목조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더 큰 의미는 삼일절과 관련 있다. 교사 주정애 등과 학생들이 중심이 돼 부산에서 가장 먼저 3·1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삼일절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1919년 3월 11일 오후 9시께 몰래 만들어 둔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거리로 나섰다. 행인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결국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1일 당시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생생히 담은 김반수 할머니의 편지 글. 1919년 3월 11일 당시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생생히 담은 김반수 할머니의 편지 글.
부산진일신여학교 앞마당을 지키는 노거수. 과거엔 담장 너머 보이는 아파트 주변이 바다였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앞마당을 지키는 노거수. 과거엔 담장 너머 보이는 아파트 주변이 바다였다.

일신여학교 건물은 2006년 보수·정비를 거쳐 현재 기념전시관으로 운영되면서 관련 역사를 알리고 있다. 1·2층 건물은 크게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1층에선 학교 역사를 비롯해 건물의 변천사와 보수 작업 도중 발견된 굴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옛 교실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에는 1920년대 교과서를 비롯해 일신여학교 출신 주요 인물들이 정리돼 있다.

건물 밖 목조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옛날 태극기를 비롯해 3·1 운동 관련 역사를 접할 수 있다. 특히 7회 졸업생 김반수 할머니의 편지 글은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던 독립만세운동의 전후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일신여학교 건물 앞마당엔 부산 앞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노거수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자리를 지킨다. 당시 학교 앞은 바다를 매립하기 전이었을 테니, 근대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노거수처럼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남학생 못지않게 호연지기를 키웠으리라.

일신여학교 건물은 월~금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한다. 평일에 문이 닫혔다면 현관문 앞 전화번호나 바로 옆 부산노회회관으로 문의하면 된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인근 좌천동 주택가에 자리한 ‘정공단’.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왜군과 맞서다 전사한 정발 장군 등을 기리는 제단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 인근 좌천동 주택가에 자리한 ‘정공단’.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왜군과 맞서다 전사한 정발 장군 등을 기리는 제단이다.

■왜군 맞선 장군·독도지킴이

동구 좌천동 일대는 3·1 운동보다 300여 년 앞서 왜군과 맞서 싸운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조금만 아래로 걸음을 옮기면 나타나는 ‘정공단’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정공단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지인 부산진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충장공 정발 장군과 당시 전사자들을 기리는 제단이다. 사방이 주택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생경한데, 돌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엄숙한 분위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외삼문에 이어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 제단의 정중앙에 붉은 글씨로 새긴 정발 장군의 비가 눈에 들어온다. 서쪽에는 장군의 막료인 이정헌, 동쪽에는 열녀 애향,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신 비석이 있다. 한 칸 아래 단에는 노비 용월의 비도 눈에 띈다.

영조 42년(1766) 옛 부산진성 남문터에 세운 정공단은 일제강점기 때 폐쇄됐다 광복 이후 다시 만들어졌다. 2009년 옛 비석을 뒤편 땅에 묻으면서 제단을 새롭게 정비했고, 지금은 (사)정공단보존회에서 관리하며 매년 음력 4월 14일 제를 올린다.

독도지킴이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과 야외에 복원 전시 중인 '도일선'. 독도지킴이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과 야외에 복원 전시 중인 '도일선'.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안용복의 호패.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안용복의 호패.

좌천동에는 정발 장군처럼 진짜 군인은 아니지만 더 일찍이 일본에 맞선 인물도 있다. 바로 독도지킴이 안용복 장군이다. 부산포 개항가도의 위쪽, 부산진일신여학교와 정공단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안용복 장군을 기념하는 ‘부산포개항문화관’이 자리한다. 문화관에는 안용복의 인적사항이 기록된 호패와 도일 상징 깃발(복원), 에도막부가 일본 해안가에 설치한 ‘죽도(독도)도해금지경고판’(사본) 등 안용복과 독도 관련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어부 안용복은 1693년(피랍)과 1696년(도일)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울릉도·독도 조업에 대해 항의하고 두 섬이 조선의 땅임을 알렸다. 부산포개항문화관 바로 옆,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에는 그의 도일 과정이 잘 정리돼 있다. 야외에는 2차 도일 때 사용한 배(도일선)도 복원돼 전시 중이다. 문화관엔 조선시대 의상(수군·독립운동가)이 비치돼 있어, 도일선을 배경으로 기념촬영도 가능하다.

일본영사관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평화의 소녀상.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할머니 형상을 하고 있다. 일본영사관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평화의 소녀상.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할머니 형상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과 해방, 그리고 평화

도시철도 좌천역에서 부산역 방면으로 두 정거장, 초량역을 나서면 일제강점기의 또 다른 아픔을 만날 수 있다. 도로를 등지고 앉아 일본영사관을 바라보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그 주인공이다.

소녀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상징이 곳곳에 담겨 있다. 댕기머리가 아니라 뜯겨 나간 단발 머리칼은 부모·고향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왼쪽 어깨 위 새는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생존 할머니를 연결한다. 소녀상 뒤편으로 드리운 그림자는 할머니 윤곽을 하고 있다. 그림자 가슴에 박힌 하얀 나비는 고인이 된 할머니들이 나비로 환생해 자유와 평화를 누렸으면 하는 염원을 담았다.

동구와 바로 맞닿은 중구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최근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리모델링을 마치고 시범운영 중인 대청동 옛 부산미문화원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거점이었다.

리모델링을 거쳐 최근 문을 연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1929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은 건물이다. 리모델링을 거쳐 최근 문을 연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1929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은 건물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1·2층 곳곳에 열람 공간이 마련돼 시민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1·2층 곳곳에 열람 공간이 마련돼 시민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건물 2층에서는 1929년 건립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부터 부산미문화원, 부산아메리카센터, 부산근대역사관까지 건물 용도와 건축 구조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리모델링 과정에서 1~2층 사이 일부 천장(바닥)을 허물고, 곳곳에 열람실을 마련해 한층 열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서가에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책 1만 권이 비치돼 있다. 특히 열람 공간 중심부 ‘부산서가’에는 부산지역 근현대사 관련 책(1000권)만 별도로 모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좋다. 때마침 별관은 삼일절부터 정식 개관(본관은 12월 예정)한다. 다음 날인 2일 오후 3시엔 개관식이 열려 미디어아트 공연 등이 펼쳐진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에서 3분만 걸으면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을 만날 수 있는 백산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자리는 100여 년 전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산상회(1914~1919)를 설립·운영하던 곳이다. 기념관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백산 선생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실에는 선생의 출생과 성장과정, 독립운동 관련 활동, 책·도장·벼루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좀 더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며 위 장소들을 탐방하고 싶다면 부산여행특공대의 어린이역사체험여행(역사N)을 이용해 봄직하다. 이달 말부터 ‘부산독립만세’ 단체여행(단일팀·10~18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부산진일신여학교-정공단-평화의 소녀상 등지를 돌며 3·1 운동을 체험할 수 있다. 삼일절을 앞둔 이달 25일엔 개별 신청자를 대상으로 특별프로그램(선착순 15명)도 마련한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백산기념관 전시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백산 선생의 흉상 백산기념관 전시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백산 선생의 흉상
백산기념관에 전시 중인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 백산기념관에 전시 중인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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