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산 왜관 소재로 한 최초의 장편소설 나오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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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길남 소설가 ‘두모포왜관 수사록’ 출간
1600년대 정치 경제 커넥션 ‘10년 직조’
실록서 인물 발견… 당대 삶 얘기로 엮어

소설가 배길남은 최애 보물 어린이세계문학전집에서 건져낸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는 구절을 새기며 산다. 그 희망을 갖고 10년간 장편소설을 썼다고 한다. 부산일보DB 소설가 배길남은 최애 보물 어린이세계문학전집에서 건져낸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는 구절을 새기며 산다. 그 희망을 갖고 10년간 장편소설을 썼다고 한다. 부산일보DB

왜관은 조선시대 부산에 450년 이상 존속하며 통상이 이뤄진 곳이다. 여기에 얽힌 숱한 얘기들이 있다. 그 왜관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최초로 탄생했다. 지역사 측면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일이다. 소설가 배길남의 첫 번째 장편소설 <두모포왜관 수사록>(함향)은 왜관 중에서 ‘고관’으로 불리는 두모포왜관을 소재로 했다. 이 장편은 공력을 들인 작품이다. 그는 “쓰다가 포기하고, 쓰고 좌절하고, 쓰고 버리고를 반복하는 일이 마구마구 뒤엉켜서 10년이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이 소설은 동래상인 ‘임소’의 성장과 그에 맞서는 이름 없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이자, 숨겨진 역사 왜관의 이야기”라고 했다.

동래상인 ‘임소’는 <조선왕조실록>에 딱 한 번 나오는 이름이다. 왜관을 통해 7만여 냥을 증식하고 참형을 앞두고도 당당히 보석을 청했다는 이다. 그는 인조 1년에 동래에서 한성까지 끌려가 공개처형을 당했다. 그 한 번의 ‘강력한 기록’에 착안해 지역적, 역사적 상상력으로 왜관 이야기를 버무려냈다. 그러니까 이 장편은 옛 기록에서 발견한 한 개의 ‘모래알’로 시작한 셈이다. 실은 한 명 더 있다. <접대사목록초>에 두모포왜관에서 밀무역 ‘잠상’을 하다가 발각된 부산 사람 ‘이춘영’이다.

소설은 당대 조선의 큰 역사적 사실 두 건을 뼈대로 취한다. 모두 광해군 때의 사실로, 하나는 1609년 기유약조이고, 다른 하나는 1613년 계축옥사다.

먼저 기유약조와 관련해 옛 기록에서 발견한 두 명, 그 둘이 얽힌 얘기가 소설의 한 기둥을 이룬다. 부산에 두모포왜관이 생긴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이었다. 당시 개성 출신인 ‘이춘영’이 갓 생긴 왜관의 물건을 유통시키는 상단(商團)을 크게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행수로 일하던 ‘임소’가 함정을 파서 이춘영을 죽음으로 내몰고 대신 상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춘영 잠상 사건’을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1609년(광해 1년) 기유약조와 연관 지어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다.

<두모포왜관 수사록>. 함향 제공 <두모포왜관 수사록>. 함향 제공

그러나 소설은 훨씬 더 큰 이야기를 풀어내고 구축한다. 광해군 당대 조선의 정치적 쟁투와 연관하면서 1613년 계축옥사까지 엮어내는 것이다. 왜관의 상단을 차지한 ‘임소’는 아주 배포가 큰 장사꾼으로 계략에 능했는데 그는 조선 조정의 대북파에 줄을 대고 있었다. 대북파의 반대파가 왜관의 밀무역을 단속하려 하자 임소가 꾸민 큰 계책이 밀무역품을 모두 날려버리는 옥쇄작전을 취하는 것이다. 옥쇄작전은 돈줄이 끊긴 대북파가 반대파를 상대로 피바람을 일으키게 하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다. 이어 임소는 피바람의 직접적 계책도 꾸미는데 그것이 계축옥사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조령의 은 강도 사건’이다.

임소는 은자(銀子), 즉 돈의 힘으로 이미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소를 말하는 부분이다. ‘(이 자는)이미 주상이 없는 자이다. (중략) 이런 이들에게 주상은 임금이 아니라 은자이다.’(325쪽)

두 역사적 사건은 이 소설의 큰 뼈대일 뿐이다. 차라리 풍성한 이야기가 소설의 안쪽 살(肉)을 이루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수사록’이란 이름값에 걸맞게 사건이 얼키설키 엮이면서 긴박하게 진행된다. 이쪽과 저쪽을 엮어낸 창작의 고통, 고통스러우나 번득이는 상상력,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소설의 앞머리에 왜관 서류 일을 하는 ‘옥 서계’와 그의 동생, 그의 첩 등 3명이 잇달아 죽는 사건이 나온다. 이 얘기는 ‘옥 서계 망령 설화’로 기장군에 실제 전해 내려오는 설화다. 배 소설가는 “2011년 <부산일보> 기획 ‘소설로 푼 부산 설화’에 그 설화를 소설로 재구성해 썼다”며 “그것이 저에게 떨어진 왜관 이야기의 씨앗이요, 저를 10년 동안 미치게 만들었던 단초”라고 했다. 그때 쓴 200자 원고지 25장의 짧은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380여 쪽의 장편소설을 직조한 것이다. 진공 같은 그 허공의 텅빈 간극을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창작력으로 메워왔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수영장터와 구포장터를 근거지로 삼는 패거리, 동래부사 이안눌, 왜 사신 접대 장면, 잠상 체포의 이야기, 밀무역을 획책하는 상단회의, 밀무역의 긴박한 전개 과정 등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중 임소의 딸과, 임소가 죽음으로 내몬 이춘영 아들, 그 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독자를 잡아끄는 부분이다. 소설에는 17세기 초를 살았던 부산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다. 작가 아내 이름과 ‘○○사이다’를 각각 거꾸로 한 이름의 인물, <수호지>에 이름만 나왔던 엑스트라 ‘소삼이’ 등이 그들이다. 이 소설의 지나칠 수 없는 특징이 부산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2011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에세이집을 냈다. 그는 “이제 우연히 저에게 날아왔던 씨앗을 어느 정도 키워낸 것 같다”고 말했다.


배길남 소설가. 부산일보DB 배길남 소설가. 부산일보DB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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