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한번 못 뵀지만 감사한 일”… 78년 만에 유골로 만난 아버지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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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김자야 씨

사진 한 장 없는 아버지 김복경
이름 석 자만으로 흔적 수소문
생존 희망에 이산가족 행사 챙겨
강제징용 기록 찾아내 위패 모셔
본보 보도로 영락공원 안치 확인
유골 찾은 뒤 “이제야 마음 편해”

지난 15일 오전 우키시마호 희생자의 딸인 김자야 씨가 부산 영락공원 제2영락원 무연고자실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확인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지난 15일 오전 우키시마호 희생자의 딸인 김자야 씨가 부산 영락공원 제2영락원 무연고자실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확인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저세상에서는)이래 갇혀 있지 말고 온 세상을 다 날아다니시소.”

지난 15일 오전 부산 영락공원 무연고자실. 내내 감정을 억눌렀던 김자야(77) 할머니가 끝내 눈물을 훔쳤다. “이제 됐다”며 돌아가자면서도 한동안 유골함 앞을 지켰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낸주 저세상 가면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못 만납니다. 너무 (사람이)많아서 못 만나요. 이름 석 자 가지고 찾아지겠습니까. 그래도 꼭 한 번 찾아볼게요. 허허.” 김 할머니는 애써 소리 내 웃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비록 유골뿐이지만 아버지를 만난 건 이날이 처음이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된 아버지 김복경 씨는 해방 후 귀국선 ‘우키시마호’를 탔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산항을 향했던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항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최소 5000명의 한국인이 수몰된 것으로 추정되며, 폭발 원인을 두고는 일본의 고의 폭침 의혹이 짙다. 사건 당시 김 씨는 불과 18~19세. 이제 막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와 뱃속 아기를 조국에 남긴 채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았다. 김 할머니가 태어나기 2주 전 일이었다.

다행히 최근 영락공원 무연고자실에서 김 씨를 비롯한 12명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이 확인(부산일보 2월 3일 자 1·2·3면 등 보도)되면서 이날 부녀는 78년 만에 처음 만나 사무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유골을)찾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후손들이 이렇게 애써 주시니 뭐라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20일 부산 남구의 한 주택에서 다시 만난 김 할머니는 아버지 기억을 하나둘 꺼냈다. 그간 이름 석 자만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쫓았다고 한다. 사진, 유품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한 20대쯤이었나. 장례비도 나오고 영락공원에 유골도 있다고 합디다. 그래서 가 봤는데, 그땐 글도 몰랐고 사람도 너무 많아 (유골을)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김자야 씨 아버지 김복경 씨의 위패가 보인다. 히라바루 나오코(서일본신문) 기자 naokonbu19@gmail.com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김자야 씨 아버지 김복경 씨의 위패가 보인다. 히라바루 나오코(서일본신문) 기자 naokonbu19@gmail.com

혹시나 살아 돌아오진 않았을까 싶어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도 빠지지 않고 챙겨 봤다. 본격적으로 다시 찾아 나선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찾을 수 있다”는 주변의 말에 용기를 얻어 아버지 고향이던 당시 울산 온양면사무소를 무작정 찾았다. 온양면과 울주군을 수차례 오가며 흔적을 쫓은 결과, 호적 서류와 아버지가 일본군에 강제징용됐다는 공식 기록을 확인했다. 끝내 유골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이 기록을 토대로 위패를 제작할 수 있었다. 현재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위패를 두고 있다.

“클 때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아들 다 키우고 나니까 (아버지)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특히 어버이날만 되면 희한하게 생각이 나요. 다행히 몇 년 전 위패를 천안 망향의 동산에서 제가 사는 동네로 옮겼어요. 한번씩 생각나면 올라갔다가 오고….”

아버지는 해방 3개월을 앞두고 일본에 끌려갔다고 했다. 매년 음력 5월 2일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이를 알았다고. 당시에 지게를 짊어져서 지게 다리가 바닥에 끌리지 않으면 15세이건 16세이건 모두 강제징용됐다고 한다.

“3개월이면 됐는데…. 방구들 밑이나 굴을 파더라도 아버지를 조금만 더 감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도)참 무심합니다.”

김 할머니는 첫돌이 지나자마자 어머니와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헤어진 뒤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후 9~10세 때 친척들로부터 아버지가 우키시마호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강제징용된 다른 친척도 있었다고 한다. “두 분이 같이 갔는데 돌아올 때는 서로 다른 배를 탔답니다. 아버지는 침몰한 배를 탄 거지.”

김 할머니는 옛 사진이 한가득 담긴 종이상자를 꺼냈다. 익숙한 듯 사진 더미에서 아주 작은 큰아버지 사진을 찾아냈다. “아버지 얼굴과 쏙 닮았다데. 한번 보이소. 참 잘 생겼지예. (아버지가)마음씨도 착하고 잘생겼다 합니다.”

아버지 유골까지 확인한 김 할머니는 이제 마음이 참 편안하다고 했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중)이름도 못 찾은 사람이 더 많다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유골도, 이름 석 자도 나라에 맡겨 두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승훈·히라바루 나오코(서일본신문) 기자 lee88@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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