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자성대인가 부산진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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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1592년 4월 14일 새벽 6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왜군이 부산진첨사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성안에 있던 거의 모든 조선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전투 병력은 1000명 미만이었을 것이고, 백성들까지 포함하면 3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측 기록에는 “문짝 아래 숨어 있던 병사도 찾아내고, 엎드린 병사도 밟아 죽였으며, 남녀는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다”고 돼 있다. 그 현장이 현재 정공단이 있는 일대라고 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왜군은 부산진성의 배후에 위치한 증산에 왜군의 총지휘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진 왜성을 축조하였다. 현재 증산공원, 좌천시민아파트, 동구도서관 일대가 바로 그 자리다. 증산공원 전망대가 서 있는 곳이 성곽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성북시장 가운데를 지나는 성북로는 수정산 쪽에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좁은 다리처럼 인위적으로 조성한 지형이다. 부산진 왜성의 동쪽 800m 거리에는 교두보적인 성격을 갖는 자성(子城)도 함께 축성하였다. 모성(母城)과 자성을 세트로 만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참혹한 전쟁터

홀대 받은 ‘왜성’, 명칭도 바꿔

유적 역사성 살리기 위한 목적

하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성곽뿐

동·서문 위치 복원, 원래와 달라

수치스러운 역사도 기억할 필요

지금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부산 지역에 쌓은 성들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데,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성이 기장의 죽도 왜성과 자성대 왜성 정도다. 부산의 인구 증가와 도시개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럽지 못한 유적이라고 홀대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축조된 자성대 왜성의 성벽은 놀라울 정도로 잘 남아 있다. 현재도 왜성을 관광자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논의는 비극적인 역사를 상기시키는 행위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였던 조선은 왜성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해 보자.

병조가 아뢰기를, “북쪽 변경의 성제(城制)를 한결같이 왜성에 의거하여 고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습니다. (왜에) 포로가 되었다가 나온 사람들이 전후로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중에도 전 좌랑 강항(姜沆), 부장 손문욱(孫文彧), 무안(務安)에 사는 무과 출신 정몽추(丁夢鯫)가 오랫동안 왜에 머물러 있었으니, 또한 필시 왜의 성지(城池)와 기계(機械)에 대해 상세히 알 것입니다.”(선조실록 33년 7월 17일 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의 피해 당사자들은 왜군이 쌓은 성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왜성을 그대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은 왜군이 쌓은 자성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바깥을 에워싸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평지의 성벽이 왜군에 의해 돌파되더라도, 왜성에 들어가 끝까지 방어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왜성이 전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부산진성의 서쪽 경계가 경부선 철도와 가까웠다. 성벽은 현재의 부산진시장 동쪽으로 나 있는 진시장로 20번 길을 따라가다가 성남초등학교 북쪽을 지나 자성로 87번 길, 조선통신사 역사관으로 이어졌다. 동쪽 경계는 더조은방문요양센터 쯤이며, 거기서 서북쪽을 비스듬하게 올라가 KT남부산지사 서쪽을 지나 범일로 90번 길과 만난다. 이 길이 대체로 부산진성의 북쪽 경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인근 부산은행 남쪽을 지나 남서쪽으로 부산진시장으로 연결되었다.

1872년의 지방지도에도 부산진성의 가운데 위치한 산 정상부에 성벽 표시와 함께 자성대(子城臺)와 만공단(萬公壇)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동쪽에는 부창(釜倉), 서쪽에는 객사 등의 관아 건물들이 보인다. 남문 바깥은 원래 바다였으나, 현재는 매립돼 남성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서문 바깥에는 영가대와 선창(船倉)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왜군이 쌓은 왜성뿐이고, 부산진성의 동문과 서문은 원래 위치가 아니라 자성대에 바짝 붙여서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복원된 서문에서 북쪽으로 가면 바로 왜성의 외곽 성벽이 보인다. 더 위로 올라가면 높이 10m에 달하는 왜성의 특징적인 성벽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것을 부산진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정식집 현관을 들어서자 일식집이 나오는 격이다.

그런데 부산시는 ‘자성대공원’의 이름을 ‘부산진성공원’으로 바꾸었다. 조선 시대 부산진성의 일부였다는 역사성을 살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그곳에 성을 쌓고 조선을 지배하려고 했던 사실이 중요한가?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왜 우리가 거듭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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