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진심을 말해야 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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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더 웨일’ 스틸 컷.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더 웨일’ 스틸 컷.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글을 써봤거나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듣거나 해봤을 말이 있을 것이다. ‘진실한 글을 써라’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고민해라’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라’ 등등.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글을 써보면 내 이야기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거짓과 가장을 섞어가며 쓴 글은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기 일쑤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글을 쓰는 일은 누구든지 어렵다.

대학 글쓰기 강좌의 강사 ‘찰리’는 온라인 강좌에서 학생들에게 정직하고, 진실한 글을 쓰라고 당부하며 수업을 마친다. 온라인 강좌답게 캠을 켜놓은 상태에서 강사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학생들 모습이 노트북 모니터에 비친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강사인 찰리만이 자기 얼굴을 감춘 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의가 끝나고 카메라는 천천히 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272kg 거구의 몸. 스스로 움직일 수도 웃는 것도 먹는 것도 쉽지 않은 불편한 몸을 가진 그.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대학 글쓰기 강사가 주인공인 ‘더 웨일’

신경성 폭식증으로 272kg 거구가 돼

죽음 감지하고 오래 못 만난 딸과 소통

브렌든 프레이저 눈부신 연기 돋보여

영화 ‘더 웨일’의 찰리는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버린 남자다.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선택한 삶이지만, 그 연인이 죽으면서 사랑 또한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신경성 폭식증에 걸려 자신을 학대하다 결국 거구의 몸이 되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거실에 앉아 온라인으로 학생들에게 에세이 쓰기를 가르치는 것. 찰리의 생존을 확인하고자 간호사 친구인 ‘리즈’가 그의 집에 들르면 함께 TV를 보는 일 정도다.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찰리는 삶에 대한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혈압이 234까지 치솟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이지만, 찰리는 건강보험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다고 버틴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꽤 많은 돈을 모았지만, 딸 ‘엘리’에게 물려주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았다. 찰리는 자신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이제 정말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한 찰리.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딸에게 연락해 자신과 시간을 보내면 재산을 물려준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춘기 딸과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딸과 보내는 시간은 녹록지 않다. 찰리도 가족을 버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부녀는 가벼운 소통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찰리가 집 밖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두 사람은 집 안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관찰하며 대치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낙제한 엘리는 찰리에게 에세이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찰리는 학생들에게 말한 것처럼 엘리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써보라고 조언한다. 그게 엘리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자면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 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정직한 글을 쓰라고 해도 정작 자신은 친구와 가족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한 채 죽기 전 딸에게 용서받거나 혹은 화해하고 싶은 것이다. 진심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어린 시절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줄 알던 엘리가 아빠에게 상처받은 후 진심을 숨기기 급급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서로가 진심으로 대할 때 그 감정은 전달되기 마련이다.

동명의 연극이 원작인 ‘더 웨일’을 빛나게 하는 건 찰리 역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의 눈부시고 화려한 연기 덕이다. 거구 역을 위해 보철 분장을 했고, 무거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껌뻑거리는 선량한 눈과 마주치게 된다. 그의 연기가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벅차오르는 울림으로 전달받는다. 저 아래 어둠 속에 있는 내 차가운 마음도 녹여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진실한 연기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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