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빼고 미래 협력에 방점… 대일 외교 개선 의지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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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

북핵 위협 속 일본 연대 강조
강제징용 협상 막바지 고려
과거사 사죄·반성 요구 생략
역대 대통령 인식과 대조 속
일 언론 “미래 지향 강조” 평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미래를 위한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며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한 3·1절임에도 윤 대통령이 일본과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북한의 핵 위협 앞에서 한·미·일 3국의 안보 공조가 절실하다는 현실 인식과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 ‘강제징용 피해 배상’ 협상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 개최 가능성이 점쳐지는 한·일정상회담의 진척 상황도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윤 대통령의 이날 대일 메시지는 수년째 끌고 있는 과거사 현안에 구체적 언급 없이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1300자 남짓 분량의 기념사에서 강제징용, 위안부 등 구체적인 과거사 현안은 등장하지 않았다. 일본에 사죄나 반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언급도 없었다.

보수, 진보를 불문하고 역대 대통령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전제 조건으로 ‘일본의 태도 변화’를 달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역사의 진실을 결코 외면해선 안된다”고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유관순 열사를 포함해 국내외 독립운동을 상술하고,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등의 표현을 써 가며 반성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와 배상 등 진정성 있는 조치가 한·일 관계 개선의 전제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윤 대통령의 첫 3·1절 메시지는 현 정권이 구상하는 대일 외교의 방향타로 여겨진다. 윤 대통령과 외교안보라인도 이번 기념사가 일본은 물론 국내 정치권과 여론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이용수 할머니가 이날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585차 수요시위'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이용수 할머니가 이날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585차 수요시위'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당장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3·1운동 정신 훼손” “대일 굴욕 외교 참사” “일본 침략을 우리 탓으로 돌리는 말투” 등 격앙된 반응을 나타냈다. 일본을 ‘파트너’로 규정하며 협력 의지를 드러낸 반면,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등 구체적인 과거사 현안은 언급하지 않았고, 사죄와 반성 요구도 없었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반일 감정을 자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도 윤 대통령이 ‘미래 지향적’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은 두 나라 외교당국을 중심으로 징용 배상 해법 협의가 상당 부분 진척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는 분석이다. 일본 외무성에서 협상 실무를 담당하는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지난 주말 비공개 방한한 것으로 전해졌다는 보도가 나온 데 이어 박진 외교부 장관도 전날 징용 피해자 유족 측과 처음으로 단체로 마주 앉아 정부안에 대한 의견을 경청했다.

정부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피해 배상금을 지급하되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금 조성에 참여하는 방안을 타협안으로 제시했지만 일본 측은 여전히 거부하는 입장이다. 징용 피해자 유족은 물론 국민 다수가 용인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대안이 마련된다면 윤 대통령의 새로운 한·일 관계 구상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일본 측이 윤 대통령 기념사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이날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의사소통할 생각”이라며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일본 언론도 윤 대통령 3·1절 기념사를 주목했다. 교도통신은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언급한 점을 두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강조했다'고 평가했고, 지지통신도 '일본과 협력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거는 동시에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았다'고 진단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과거 한국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윤 대통령은 미래 지향을 강조했다'고 평가했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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