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쇠고기 시대’ 주도한 반인들 있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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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쇠고기/강명관

성균관 공노비로 푸줏간인 현방 운영
성균관을 유지시킨 핵심 세력
불법 도축 벌금은 삼법사 재정 충당
궁전 일 하는 궁방에게도 수탈 당해

성균관 노비들인 반인과 그들의 푸줏간 현방을 통해 조선 후기 ‘쇠고기 시대’가 열렸다. 사진은 민속놀이이 소싸움 대회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성균관 노비들인 반인과 그들의 푸줏간 현방을 통해 조선 후기 ‘쇠고기 시대’가 열렸다. 사진은 민속놀이이 소싸움 대회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강명관 전 부산대 교수의 <노비와 쇠고기>는 조선시대 쇠고기를 팔던 노비들의 피와 땀의 역사를 풀어낸 역작이다. 백정이 아니라 반인(泮人)의 역사다. 지방에서 소를 도축하던 이들이 백정이라면, 서울에서 소를 도축하는 이들이 반인이었다고 한다.

이 반인이 특이했다. 반인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공노비였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 하면서 성균관 근처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했는데, 이 반촌에 사는 성균관 노비들을 반인이라 부른 것이다. 반인의 수는 17세기에 대체로 2000명 선이었고, 18세기 말에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8세기 조선은 해마다 20만 마리 소를 도축할 정도의 ‘쇠고기 국가’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를 ‘쇠고기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시대의 주역이 반인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소 도축은 원칙적으로 불법이었다. 그 불법을 감당할 이들이 서울에서는 성균관 노비, 즉 반인으로 특정된 것이었다. 반인들이 운영한 푸줏간이 현방(懸房)이었다. 현방은 ‘쇠고기를 매달아서 판매하는 곳’이란 뜻이다. 반인들은 도축을 하고 현방 독점경영권을 갖는 대신 이쪽저쪽에 막대한 세금을 납부했다.

여기에 조선시대의 수탈 체제가 작동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생각이다. 첫째 조선이라는 국가는 사족(士族)국가의 최고 학교인 성균관을 운영하면서 재정을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성균관은 반인의 노동력을 수탈하고, 반인들의 현방 경영에서 얻는 수익 일부를 착취해 유지됐다고 한다. 요컨대 성균관을 유지시킨 핵심 세력이 반인이었고, 그 물적 토대는 반인의 쇠고기 산업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더욱 중요한 것은 반인들이 삼법사(三法司)에 내던 막대한 세금이었다. 불법 도축을 하는 벌금인 속전은 삼법사를 지탱한 재정이었다. 삼법사는 형조·한성부·사헌부로 오늘날 사법기관인 경찰과 검찰이었다. 삼법사가 거느린 실무관리들의 월급은 국가가 지급해야 했는데 국가는 그럴 여유와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사법기관 실무관리들의 월급을 반인들이 내는 속전으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성균관이 반인과 기묘하게 얽혀 있는 수탈자였다면, 삼법사는 반인과 격절된 무도한 수탈자였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는 다른 수탈자도 등장했다. 쇠고기의 큰 고객인 궁전 일을 하는 궁방(宮房)도 하등의 명분도 없이 반인을 수탈했다. 반인들은 삼법사, 성균관, 궁방으로부터 이중 삼중의 수탈을 당했던 것이다. 조선 사족체제의 최고 교육기관과 경찰기구가, 나중에는 궁방까지 반인과 현방의 수탈 위에 존립한 것이었다고 한다.

푸줏간인 현방은 많을 때는 48곳을 헤아렸던 적도 있으나 대체로 21~23곳에 달했다. 각 현방에는 두목까지 있었으며, 반인 70~80호가 소속됐다고 한다. 대체로 1가구 당 1년에 5회 정도 도축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반인과 현방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굴해냈다는 것이다. 1789년 궁방의 횡포에 맞서 사흘 동안 현방 문을 닫았던 철도(撤屠), 성균관 횡포에 맞서 성균관 식당에 식사 제공 노역을 거부한 궐공(闕供), 이로 인해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물러나는 공재(空齋) 등이 있었다. 1602년께 성균관 소 도축은 기정사실이 돼 ‘성균관은 소 잡는 곳’ ‘도사(짐승을 도축해 판매하는 가게)의 소굴’로 시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반인은 성균관의 문자 행위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학식을 갖춘 이를 배출했다. 18세기 안광수 정학수 박영석은 70~100명의 아동을 모아 학교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반인들은 노비로서 군역을 지지 않았는데 신분상승을 위해 균역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200명이 총융청에 소속돼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1897년 명성황후 장례식 때는 전례에 따라 상여를 맸는데 이때 현방의 속전 5개월치를 감해주었다고 한다.

신분제가 붕괴하는 가운데 반인 집단은 그들의 학교를 개교했는데 1910년 숭교의숙이 그것이다. 안광수와 정학수의 학교 이후 100여 년 만에 반인 학교가 생겼던 것이다. 1908년 숭교의숙 설립을 이끈 반인이 홍태윤 김태훈이었는데 그중 홍태윤은 1896년 영평 군수로 재직했다고 한다. 성균관 노비로 소를 잡던 반인이 지방관에 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신분 변화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반인이란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반인들이 바랐던 진정한 해방이었을 것인데 그게 우리의 착종된 근대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강명관 지음/푸른역사/704쪽/3만 9000원.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제공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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