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망자’된 노숙인, 아픔 딛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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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사업 하다 사기 당해 빚더미
우울증 시달리다 가출해 잠적
가족 청구로 2005년 사망자로
18년 동안 노숙 전전 건강 악화
금정희망의집·검찰 도움 손길
주민증 다시 발급 자립 준비 마쳐

남자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이었다. 18년간 노숙자로 살며 길바닥을 헤맸다. 죽은 이와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대로 지워지려고 했다. 서류상 ‘망자’로 기록돼 노숙 생활을 하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선 50대 이화영(가명) 씨 이야기다.

2010년 어느 날 그는 평소처럼 부산의 한 공사 현장으로 출근했다. 이 씨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고시원에서 혼자 살았다. 이날은 새로운 현장으로 출근하는 날. 깐깐하기로 소문난 공사 반장이 인부들 신분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확인했다. 그러다 이 씨 앞에서 멈춰 섰다. 반장이 “당신 사망자로 나오는데 정체가 뭐냐”라고 묻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씨가 사망자가 된 사연은 기구했다. 학업에 뜻이 있었던 이 씨는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지인과 함께 학원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초반부터 휘청거렸고 동업자에게 사기까지 크게 당해 삶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빚 독촉에 시달렸던 그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증을 앓았다.

가족에게 더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던 그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가족들은 갑자기 행방불명된 그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 씨 어머니가 실종 선고를 청구하면서 2005년 사망자로 등록됐다. 이 씨는 “집을 나온 뒤 공사 현장을 전전하며 여러 지역을 떠돌았다”며 “특별한 일 없이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하느라 사망자가 됐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다”고 전했다.

서류상 사망자가 된 그의 삶은 고달팠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그를 받아주는 일터는 없었다. 모아뒀던 자금을 전부 소진해 고시원에서 쫓기듯 나왔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 씨는 주민등록 회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복잡한 법률 절차와 비용은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한 그는 한편으로 세상에서 지워져 유령처럼 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노숙 생활을 시작했고 18년이라는 긴 세월 이 씨는 서류상 망자로 남았다.

노숙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던 지난해 10월. 코로나 이후 무료급식소도 중단돼 식사도 하지 못했고 건강은 악화됐다. 몸은 떨리기 시작했고 잇몸은 녹아내렸다. 노숙 생활에 젖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길에서 ‘몸이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겁도 났다. 그때 노숙인을 지원하고 돕는 ‘금정희망의집’이 이 씨가 노숙하던 곳으로 와 지원에 나섰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다시 자립을 결심한 이 씨도 이들의 손을 꼭 붙잡았다.

금정희망의집은 이 씨의 딱한 사연을 듣고 그를 돕기 위해 팔 걷고 나섰다. 검찰청에서 사망자 회생을 도와준다는 소식을 접했고 필요한 서류를 챙겨 곧바로 검찰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만난 부산지검 김재경(38) 수사관은 서류 발급부터 재판 청구 신청까지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왔다. 연락이 끊긴 가족도 본인이 직접 나서 찾아주며 끊어진 관계의 끈을 다시 이어줬다. 이 씨 어머니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소식도 김 수사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최근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으면서 자립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다시 세상에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며 “아직 겁도 많이 나지만 더는 후회할 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다시 자립해 살아가려 한다”고 의지를 내비쳤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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