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인조의 오판과 무능이 불러온 전쟁”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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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636/유근표

소현세자 죽음은 안타까운 역사 장면
인조, 며느리·손자 둘까지 결국 죽여

<인조 1636>. 북루덴스 제공 <인조 1636>. 북루덴스 제공

혼군(昏君)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말한다. <인조 1636>은 1636년 병자호란을 혼군에 의해 촉발된 전쟁으로 말한다. 부제가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침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결국 인조(재위 1623~1649)의 오판과 무능이 불러온 전쟁이라는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을 내쫓은 반정(反正)으로 임금이 됐다. 반정은 쿠데타였다.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는 동아시아 판도를 잘못 읽고 결국 백성의 피를 짜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간 백성이 10만 명을 헤아렸다. 처참했다. 끌려가다 죽은 백성들을 아무 곳에나 집단적으로 묻은 곳을 ‘고려총’이라 했다. 탈출하다가 붙잡힌 피로인, 조선의 백성은 발뒤꿈치를 도려내는 월형(刖刑)에 처해졌다. 억울한 사연은 넘쳐났다. 청에서 아이를 밴 채로 돌아온 여인은 ‘가문을 망쳤다’며 노골적인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을 택하는 경우가 있었고, 자살하지 못해 아이를 낳으면 ‘호로(胡虜) 새끼가 태어났다’며 수군댔다.

저자는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고 지적한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그 10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그러다가 더 큰 전란을 맞은 것이니, 참 한심한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반정 성공 후 피바람이 불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의 26세 폐세자 이지는 자결을 강요당했고, 절망한 폐세자빈도 자결했고, 아들 부부의 비보를 전해 들은 폐비 류씨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유배지 강화에서 생을 마감했다. 모두 인조 원년의 일이었다.

인조 정권의 향방은 초기부터 드러났다. 인조 3년, 정권을 비꼬는 노래 ‘상시가(傷時歌)’가 이미 시중에 떠돌았다. ‘아! 너희 훈신들아/스스로 뽐내지 마라/그들의 집에 살고/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그들의 말을 타며/다시 그들의 일을 행할진대/너희들과 그들이/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백성들은 임란 때의 선조에 이어 도성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임금을 또다시 지켜본 터였다.

인조 정권의 큰 비극은 1645년 ‘소현세자의 죽음’이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8년 동안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조선에 돌아온 지 겨우 2달 만에 죽었다. 인조는 귀국한 아들을 차갑게 대했다.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세자에게 양위를 시키지 않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인조실록> 기록이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다.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수입해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역사 장면이다. 세자는 명의 멸망을 경험했고, 청 제국의 복잡한 정세와, 특히 아담 샬을 통해 새로운 서양 과학을 접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가 죽은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실록은 ‘추측만으로 법을 집행했다’고 적었다. 강씨가 죽은 그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를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인조의 손자들이었다. 아들 셋 중 첫째와 둘째는 1년 만에 죽었다. 잘 운용하지 못한 인조의 권력은 무섭고 비정한 것이었다. 그의 무능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 조선의 향방을 정했다고 봐야 한다. 아무나 잡아서 안 되는 것이 권력이다. 유근표 지음/북루덴스/352쪽/1만 85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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