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범죄 왜 못 막나…‘심리적 지배’ 범죄 느는데 수사·재판 지침도 없어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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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의존하는 은둔형 약자 대상
피해자 무기력 빠져 ‘착취’ 몰라
성매매 강요 등 해당 사례 증가세
범죄 규명 어렵고 법적 보호 미비

4세 여아의 아동학대와 사망의 배경이 된 성매매 강요 사건은 극단적인 정신적 의존 상태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범죄로 분석된다. 비슷한 형태의 범죄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아직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준비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20일 부산경찰청 등에 따르면 4세 여아의 친모 A 씨는 동거녀 B 씨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매우 의존하는 상태였다. B 씨는 이를 악용해 A 씨를 심리적으로 장악한 뒤 성매매를 요구했다. A 씨가 장기간 하루 수차례 성매매를 해 벌어들인 1억여 원의 돈을 B 씨에 넘긴 사실 등을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적 사이였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특히 주변인과 소통이 단절된 A 씨가 B 씨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당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과정은 가스라이팅 범죄의 여러 특징과 정확히 일치한다. 통상 가스라이팅 범죄는 은둔형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극단적인 의존 상황에서 벌어진다. 남성은 노동력이나 경제적 착취, 여성은 성적 행위나 성매매 강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가스라이팅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는 심각한 무기력에 빠지고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늘어나는 추세다. 공동체 해체와 대면 소통 축소 등으로 은둔형 사회적 약자가 증가하는 게 이유로 꼽힌다. 실제 지난달 부산지법은 가스라이팅 뒤 성매매를 강요한 남성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2204만 원을 추징했다. 지적장애 여성에게 남자친구로 접근해 정서적 지배를 한 뒤 146차례에 걸쳐 성매매를 시키고 대금을 가로챈 혐의였다.

또 이달 초 대구에선 40대 부부가 자신들을 잘 따르던 30대 옛 직장 후배를 “넌 나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해 3년간 2500회 가량 성매매를 강요하고 5억 원가량을 뜯어내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최근 다시 불거진 기독교복음선교회(JMS) 내 성폭행 사건도 가스라이팅 범죄로 분류되고 있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약자를 대상으로 장기간 인격을 황폐화시키는 등 위험성이 높은 편이지만, 제도적 보호막은 아직 준비돼 있지 않다. 범죄 피해자가 피해를 인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별도 수사기법이 없으면 가스라이팅 범죄는 밝히기 어렵다는 게 수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에는 아직 가스라이팅, 심리 지배 등에 대한 사법적 정의도 없다. 당연히 수사지침이나 피해자 조사 시 유의사항 등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승재현 선임연구위원은 “심리적 지배를 통해 상대방에게 어떠한 행위를 시켰다고 해서 모든 행위를 처벌할 수는 없다”며 “하지만 정신적인 학대도 폭력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 있도록 그 개념을 다변화시키고,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고 범죄에 내몰린 심각한 폭력이라면 이를 가중처벌할 수 있도록 양형인자에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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