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멋의 말이 아니라 함축과 침묵이 필요한 시대
이우걸 시인 등단 50년 시조집 ‘이명’
넘치는 말 속 ‘소통 실종’ 꼬집어
쓸데 없이 들었던 것에 귀 닫고
생채기의 울음마저 들으려는
두 의미의 ‘이명’ 시어로 포착
구구한 말 아닌 마음과 온기 절실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은 장광설을 넘어서는 ‘함축’에 있지 않을까. 소통 부재의 ‘말 많음’ 앞에서는 귀가 울린다. 창원시에 사는 이우걸 시조시인의 등단 50년 시조집 <이명>(천년의시작)은 말 많으나 외려 소통이 실종된 세태를 꼬집고 있다.
코로나 시절, 우리는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다녔다. 마스크는 ‘오만한 인간을 향해 누가 창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한때의 자만이/저지른 형벌임을/아무도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마스크에 가려져 ‘입이 없’(36쪽)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 많은 입이 없는 게 나을까. ‘곳곳에 귀를 대고 얻어낸 소식을/대단한 전리품인 양’ 입은 떠벌이기 일쑤다. 쓸데없이 들었던 것들, ‘그것이 울음이 되어/스스로 닫으려’(34쪽) 하는 것이, 시인이 역설적으로 포착한 ‘이명’이다.
시인은 함축적 풍경을 꿰뚫어 보고, 새로운 소리를 들으라고 일갈한다. ‘초승달’은 처연하게 빛나는 것이다.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누명을 애소하는 달’로서 ‘허공에’(38쪽) 걸려 있다. ‘억새’는 우는 것이다. ‘저무는 하늘을 휘젓는 갈필들//박토를 물고 견뎌 온 민초들의 입말이다//쫓기며 살아온 생의//칼끝 같은//상소문이다’(19쪽). 그런 걸 보지 못하고 못 들으니 ‘울음은 울어서 그 울음을 이기려는 것’(44쪽)인 듯 귀뚜라미가 그칠 줄 모르고 우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귀가 울린다. ‘생의 언덕바지에 목 쉰 파도가 산다//파도는 사연 많은 생채기의 울음들이다//그 소리 다 읽고 싶어//귀는 늘 잠이 없었다’(24쪽). 차마 다 듣지 못한 그 생채기의 울음을 마저 들으려는 것이 또 다른 ‘이명’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빗살무늬’를 새기며 산다. ‘우리 삶의 뒷골목에는 늘 그늘이 살고 있다/그것들의 어딘가에는 빗살 무늬가 새겨진다/격랑을 이겨낸 자의 뜨거운 심전도 같은’(54쪽). 그것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별것 아니다. ‘낙엽’ 같은 것이다. ‘가쁜 숨결과 외로움이 배어 있다//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83쪽).
1946년생 시인은 ‘자화상’을 그린다. ‘사변을 만나고, 기아에 허덕이고, 독재를 만나고, 시위에 휩싸이고/내 생이 스친 역들은/늘 그런 화염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내가 안 보였다’고 한다. 대신 ‘맞은편 신호등 앞에/한 노인이 서 있었다’(46쪽)는 것이다.
그 노인은 ‘12월 남강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 있었다. ‘‘먼저 드시지요’/젊은이가 잔을 건넨다/‘아니, 시간 있는데?’/웃으며 받아 든 노인’(60쪽). 웃으며 받아 들 수 있는 ‘온기 한 잔’이 우리가 지금 나눠야 할 것의 하나다. 더 머금어지고 함축돼야 한다는 거다. 구구한 말이 아니라 온기, 마음이 필요하다. 이명의 세태 속에서 함축, 침묵이 필요하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