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역사문제와 역사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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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훈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일 역사문제, 일본 반성·사과는 미흡
자민당 독점체제 속 우익화 변함없어
양국 정상회담으로 안보협력 강화 예상
일본의 강대국 파트너 역사 재현 전망
한국인 이익 훼손 없어야 관계 발전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발전 전망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오부치 일본 총리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고 표현하면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다.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미래지향적인 로드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양국 간의 ‘역사문제’인 위안부, 강제징용,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등이 쟁점화될 때마다 일본 정부의 언행과 태도는 오부치의 표현에 현저히 미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한국 국민은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있는가에 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역사문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인식 차이는 미래를 저당잡고, 양국의 관계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양국의 정치체제 차이도 이 문제를 되풀이하는 데 기여했다. 자민당 일당 독점체제로 일본 우익은 변함없는 역사인식을 계승하여 왔다.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결핍되었고, 진정한 사죄 발언은 인색했다. 반면 수평적 정치권력 교체가 발생하는 한국은 서로 다른 성격의 정부가 역사문제에 서로 다른 접근을 보였다. 특히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지난 정부가 무효화하는 결정을 함에 따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지, 반도체 등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현재, 강제징용을 둘러싼 일본의 사죄와 배상문제는 2018년 우리 대법원 판결에서 시작되었다. 14명의 원고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권과 위자료청구권의 판결금과 그 이자를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게 지급할 것을 골자로 한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다. 아울러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 당시 국가 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의 법적인 성격에 대하여 양국 간에 합의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현 정부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자 2023년 3월 6일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을 발표하였다. 이는 민법 제469조에 근거한 ‘제3자 변제’를 통한 해법이다. 일본 정부나 일본 피고기업의 사죄나 보상 없이 한국기업의 재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는 2015년 자신이 공들여 추진한 위안부 합의 이행을 재차 요구하였다. 아울러 한일군사보호협정과 한일안보정책협의회를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일본과의 깊숙한 안보협력은 한·일 관계가 역사문제를 넘어서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안보협력 체제이다.

이는 강대국들이 일본을 동북아시아에서 핵심 파트너로 삼았던 ‘역사의 재현(再現)’이다. 일본과의 해양세력 동맹을 기반으로 대륙세력(러시아나 중국)을 견제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전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일동맹(1902, 1905)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1905)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냉전시기 반소전략으로서 현재의 미일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놓았다.

21세기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력균형 변화로 인해서 지역 내에서 반중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2007년 미국, 일본, 인도, 호주가 참여하는 안보대화 협의체 쿼드(Quad)가 출범했고,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참여하는 군사협의체 오커스(AUKUS)도 결성되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지리적으로 먼 역내 국가들과 상호 안보의무를 갖는 다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국 역시 참여를 요구받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오래전부터 ‘역사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해 왔다.

향후 한·일 양국 간 산적한 문제들이 순차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이루어졌던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문제,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문제, 후쿠시마 등 일본 8개 현의 한국 내 수산물 수입금지 조처 등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현 정부는 한·일 관계 악화를 2018년 대법원 판결 탓으로 돌리며,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면죄부를 부여했다. 만일 향후 한·일 관계 현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훼손되게 된다면, ‘굴욕외교’ 또는 ‘계묘국치’라고 비판하는 야당의 목소리는 국민들로부터 점차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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