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은 동아시아 번영 가져왔던 조선의 공식 무역상품”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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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이철성

인삼 통해 격동기 한국사 소개
영조 장수 비결은 산삼 위주 ‘건공탕’
정조 수원 화성 건설 주요 재정은 ‘홍삼’
인삼,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 출품

2017년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렬이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앞을 지나고 있다. 수원 화성 건설 재정의 주요 재원은 홍삼이었다. 부산일보DB 2017년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렬이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앞을 지나고 있다. 수원 화성 건설 재정의 주요 재원은 홍삼이었다. 부산일보DB

조선은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100여 년간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일본은 청나라와의 공식적인 외교채널이 끊어진 반면, 조선과는 1609년 국교를 다시 열었다. 일본에서 필요한 물건의 대부분은 쓰시마번을 통해 수입됐다. 조선 상인은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을 왜관에서 일본 상인에게 넘길 경우 약 2.7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은 중국 비단만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이 수입한 최고의 인기 상품은 조선의 인삼이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동의보감>을 비롯한 각종 조선 의학서가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한층 높아지면서 인상 수요가 폭증했다.

일본에서는 조선 인삼을 사들여 오기 위해 ‘인삼대왕고은’이라는 순도 80퍼센트의 특주은을 만들었다. 조선 상인들이 순도가 낮은 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에서 통용되는 은화의 순도가 30퍼센트 내외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조선 인삼을 수입하려는 일본 사람들의 각별한 노력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은 은을 교토에서 인삼대왕고은으로 주조한 뒤 쓰시마를 거쳐 왜관으로 가져와 조선 인삼, 중국 물건들과 교환했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 은화는 다시 조선 인삼과 함께 무역 자금이 돼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의 대중국 무역의 핵심은 해마다 3~4회 정도 파견된 조선 사신단이 청나라 북경을 오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사행무역이었다. 사행무역은 책문·심양·북경에서의 무역이 중심을 이뤘다. 압록강에서 120리 떨어진 책문에는 조선 사행이 오는 때를 맞춰서 중국 각지 상인들이 여러 물건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조선 상인들이 중국에서 사들인 물건은 주로 백사(白絲)와 비단이었다. 주요 결제 수단은 인삼과 은화였다. 이처럼 인삼은 광해군~경종 시기 한·중·일을 잇는 인삼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왔던 조선의 공식 무역상품이었다.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표지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표지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은 인삼을 통해 격동기 한국 역사를 꿰어낸 책이다. 제도·정책 중심의 인삼 통사가 아니라 읽는 맛이 각별한 37건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생활 속 인삼 이야기,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 속의 인삼, 개항 이후 조선의 홍삼 무역과 근대 서양이 본 고려인삼 이야기, 일제강점기 인삼산업과 식민지 조선에서 고려인삼이 품고 있던 상징성, 8·15 광복 이후 고려인삼이 전매제에서 민영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담았다.

원래 인삼은 산에서 나는 인삼인 산삼뿐이었다. 인삼 재배는 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까지 자연산 산삼이 절종 위기에 처하는 시점에 널리 시도되어 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생산되었다. 인삼이 밭에서 갓 재배될 때만 해도 그것은 ‘가삼’이었다. 하지만 가삼은 곧 인삼의 지위에 올랐고, 인삼은 산삼이라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삼을 쪄 만든 ‘홍삼’이 인삼과 동일한 위치에 올랐다. 홍삼은 1797년(정조 21)부터 조선의 공식 무역상품이었다.

영조가 83세까지 장수하고 52년간 권좌를 지킨 비결은 산삼을 위주로 한 ‘건공탕’에 있었다. 영조는 65세 때인 1758년(영조 34) 건공탕을 먹기 시작해 건강을 유지했다. 건공탕은 인삼, 백출, 말린 생강, 감초를 달인 이중탕에 인삼 두 돈쭝과 좁쌀을 넣어 마실 수 있게 한 것이다. 영조의 건강을 지키는 공신 같은 약의 핵심 재료는 바로 산삼이었다.

정조는 “국가 재정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으로, 이를 바로잡아야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다”고 천명했다. 이를 위해 재정 운영의 사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을 없애고 공공성을 높이려 했다. 수원 화성 건설은 정조의 정치적 이상이 담긴 것이었다. 정조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에게 임금을 주었고, 땅 값을 주고 토지를 수용했다. 공사를 마친 이후에도 신도시 번영과 민생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와 같은 재정 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홍삼이었다.

인삼 문화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점도 흥미롭다. 고려인삼은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이 박람회에는 동아시아의 일본관, 중국관, 조선관이 모두 설치됐다. 조선전시관에는 68개 품목이 도착했다. 당시 미국 신문과 잡지에서 조선의 인삼, 가마, 종이, 호피, 연 등 전시품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기사들이 실렸다.

아편의 해독에 인삼이 효과적이라 해서 아편전쟁 직후 중국 수출량이 두 배로 뛰었다든가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개혁 군주 민 망 황제의 인삼 사랑이 지극해 신하와 무관들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선물로 인삼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이철성 지음/푸른역사/420쪽/2만 20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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