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아픔을, 비극을, 직시하기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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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상 사회부 차장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는 불구경이라고 한다. 불이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가까이서 보는 불은 무섭고 잔인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집들이 잿더미가 된 현장에서 안쓰러움을 느끼지, 재미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불길 속에서 누군가 희생되고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현장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부터 돌릴 것이다.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타인의 행동을 관찰해 모방하게 하고,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나의 일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한다. 그 덕에 우리는 타인에 공감할 수 있고 남의 아픔에 안쓰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만일 타인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다면, 거울 뉴런의 효과도 고통으로 이어진다.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나의 일처럼 느끼는 거다. 그래서 안쓰러움을 넘어서는 타인의 불행은 회피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무 큰 비극을 애써 외면하거나, 빨리 잊으려 하는 마음도 인간의 본성이다.

좋은 것만 보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나쁜 것들을 피하려 발버둥도 치지만, 세상은 너무 뒤숭숭하다. 그나마 재해나 사고는 슬픔과 안쓰러움으로 끝날 수 있다. 반면 끔찍한 범죄 소식은 종종 인간이라는 존재에 환멸까지 느끼게 한다.

잔혹한 범죄 뉴스를 빨리 휘발시키는 방법이 악마를 등장시켜 사건을 단순화하는 거다. 가해자가 악마가 되면, 평범한 사람인 우리에게 그런 비극은 흔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방어 벽이 생긴다.

게다가 비극을 악마가 벌인 일로 이해하면, 비극의 과정은 단순해지고 깊게 사건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어진다. 비극의 이유를 살피면서 느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정서적으로 좋은 전략이다. 다만 비극 뒤의 구조적 문제들은 계속 숨어서 작동하며, 또 다른 비극을 만들 수도 있다.

최근 보도에서 학대로 숨진 4세 여아 ‘가을이’(가명) 사건의 주범은 2명으로 늘었다. 때리고 학대한 친모와 500여 일간 친모를 가스라이팅해 성매매를 시키고 억대의 대금을 챙긴 동거녀. 두 사람의 행위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가을이가 겪었던 시간은 너무 아파 보여서, 떠올리는 것이 무섭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면 궁금해지는 것들이 생긴다. 딸을 지키려 쉼터까지 찾아가고 도움을 요청하던 친모가 어떻게 학대의 가해자가 됐는지, 벼랑 끝의 모녀에게 먼저 손을 내민 언니가 수 개월 뒤부터 잔혹한 포주로 점차 변하게 됐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가을이의 비극을 직시하다 보면 관계 단절을 조장하는 사회, 빈약한 복지망, 너무 만연한 성매매 등 숨은 배경들이 보인다. 두 사람에게 결코 면죄부를 줄 수 없고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한 차례 분노만 쏟아내고 비극을 외면하면 숨은 배경은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가을이 또래의 아이들이 맞아준다. 어쩔 수 없이 가을이가 문득 문득 떠오른다. 빨리 잊어버리고도 싶다가도, 이렇게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생각의 끝은 똑같이 마무리된다. 가을아, 이젠 아프지 않기를….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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