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팔 최동원이 던진 건 공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부산피디아]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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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피디아] (1) 불멸의 투수 최동원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투구
살인적인 등판으로 얻은 영광
후배부터 챙겼던 야구계 큰형
부산 ‘야구 DNA’ 만든 전설


매년 4월 부산 시민의 가슴엔 작은 설렘이 싹튼다. 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바로 프로야구가 개막하기 때문이다. 시민 기대와는 달리 부산에 연고를 둔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는 매년 하위권에서 못 벗어난다. 그럼에도 부산만큼 야구에 열정이 뜨거운 도시는 단연코 대한민국에 없다. 왜 그럴까? 부산이 '구도(球都)'로 불리며 시민의 가슴에 ‘야구 DNA’가 새겨진 것은 ‘불멸의 투수’ 최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사직야구장을 찾는다. 최동원 동상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아래 사진은 1985년 9월 8일 MBC 청룡전에서 '용틀임'이라 불리는 특유의 폼으로 역투하며 완봉승을 달성하는 최동원. 부산일보DB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사직야구장을 찾는다. 최동원 동상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아래 사진은 1985년 9월 8일 MBC 청룡전에서 '용틀임'이라 불리는 특유의 폼으로 역투하며 완봉승을 달성하는 최동원. 부산일보DB

내 잘못으로 홈런 맞아 사과하니

“괜찮다 마 들어가라” 다독이더라


최동원 전담 포수 한문연 감독 최동원 전담 포수 한문연 감독

■밭에서 공 던지던 소년, 레전드가 되다

손흥민이 ‘월클(월드클래스)’이 된 배경에는 아버지 손웅정 씨가 있다. 마찬가지로 최동원도 부친 최윤식 씨와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레전드가 될 수 있었다. 중·고교 시절 부친과 함께 일본 프로야구 투수 영상을 보며 공부했고, 훈련에는 온 가족이 나섰다.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89) 여사는 “집 앞 밭에 운동장을 그렸다. 삽으로 불룩하게 만든 마운드 위에서 동원이가 공을 던지면 동생들이 볼보이를 자처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고교 시절 황금사자기, 청룡기 등 전국 대회에서 경남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연세대에서도 활약을 펼쳤고 1983년 프로로 전환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다.


자기보다 팀 위해 몸 불사르고

몸 으스러져도 공동체 헌신했지

최동원기념사업회 강진수 사무총장. 최동원기념사업회 강진수 사무총장.

그리고 이듬해, 무쇠팔의 역사가 쓰였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롯데는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다. 최동원은 1, 3, 5, 6, 7차전을 던지게 됐다. 살인적인 등판 계획. 최동원은 주위의 우려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알겠심더, 함 해 보입시더.” 최동원의 전담 포수였던 한문연 전 NC다이노스 2군 감독은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정”이라며 “책임감이 강했던 최동원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1차전 138개, 3차전 149개, 5차전 127개, 6차전 72개, 7차전 124개. 10일 동안 5경기를 치르며 던진 공의 개수다. 7차전까지 이어진 ‘불꽃 접전’. 몸을 불사르는 역투가 계속되면서 공의 위력은 차츰 떨어졌다. 결국 6회 말 홈런을 얻어맞고 만다. 한 감독은 “내가 공을 몸쪽으로 유도하다 홈런을 맞았다”며 “너무 미안해 마운드에 올라 사과했더니 웃으며 '괜찮다, 마 들어가라'며 다독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반격은 7회부터 시작됐다. 상대의 실책을 발판 삼은 롯데는 8회 유두열의 홈런으로 역전하게 된다. 최동원의 구위도 다시 살아났다. 한 감독은 “죽어 가던 볼 끝이 살아나는 걸 보면서 철인이라는 별명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9회 말,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열흘 동안 5경기 등판 4승 1패, 총 610개 투구라는 기록을 남긴 최동원. 무쇠팔의 전설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김 여사는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응원했다”며 “기뻤지만 아들의 입이 피곤으로 틀어져 있는 게 먼저 보였다”고 회상했다.


경기 뛸 때는 힘든 내색 않더니

아프단 말에 내 심장까지 아팠어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

■마운드를 내려오다

롯데에 우승 트로피를 안기고 프로야구의 부흥을 가져온 최동원. 그 뒤엔 혹사의 기록이 있었다. 그는 1983~87년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공을 던졌다. 당연히 팔이 빨리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경기력은 떨어졌고, 인생도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1988년 선수 복지를 위해 ‘프로야구선수협회’ 창설을 시도했지만 각 구단 반대로 실패했다. 최동원기념사업회 강진수 사무총장은 “선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상조회에 가까웠던 개념”이라며 “뜻은 순수했지만 당시 사회통념상 저항이 심했다”고 말했다.

선수협을 둘러싼 구단과의 갈등, 그로 인해 ‘미운털’이 박히면서 삼성으로의 보복성 트레이드. 배신감과 야구에 대한 흥미 상실, 혹사의 후유증까지 겹치며 부진한 기록을 이어 가던 그는 1990년 한국시리즈 1차전 구원투수 등판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만 32세의 젊은 나이. 이후 2001년에는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로, 2007년에는 한화 2군 감독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다. 대장암이 발병해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김 여사는 “아픈 걸 티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장에 1cm 정도 되는 혹이 있었지만 '제거했으니 안심하라'고 말해 그렇게 믿었다”고 밝혔다.



■별이 된 전설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이벤트 경기에 모습을 드러낸 최동원. 수척한 얼굴로 경기엔 뛰지 않고 벤치만 지켰다. 당시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을 권했다. 2개월 뒤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9월 14일 새벽.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부산 시민 모두 그의 부고를 듣고 슬퍼했다.

아들의 투병을 바라본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김 여사는 “경기에서 뛰어도 힘들다고 내색 안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내 손을 자기 엉덩이 쪽으로 가져다 댔다”며 “그러더니 “어머니 여기가 너무 아파요”라고 했다. 엉덩이에 닿은 손에서부터 내 심장까지 아프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롯데는 9월 30일을 ‘최동원 데이’로 지정했다. 그가 198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날이다. 11번은 영구 결번이 됐고 부산에서는 최동원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2013년 9월 14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째 되던 날 사업회는 사직구장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한국의 ‘사이영상’이라고 불리는 ‘최동원상’도 제정했다. 올해로 10회를 맞는 최동원상 시상식은 매년 11월 11일 부산에서 열린다.

김 여사는 아들의 동상이 있는 사직운동장을 자주 찾는다. 그리고 동상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낸다. “동원아 동원아 이제 아픈 거 하나도 없지?” 김 여사는 동상의 엉덩이 부분을 만지며 하늘에 묻는다. 그러면 ‘이제 괜찮아요’라는 아들의 대답이 멀리서 들려온다고 한다.


■존재 자체가 야구였던 사람

프로야구 레전드 최동원,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한 감독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스타”라며 “특히 팀에 대한 희생과 열정은 요즘 젊은 선수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강 사무총장은 최동원을 “부산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산이 배출한 문화적 자산 가치가 있는 ‘전설’”이라며 “자기보다 팀을 위해 몸을 불사른 선수, 몸이 으스러지더라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선수”라고 말했다. 마운드에서는 물러나는 게 없었고, 개인보다 팀을 우선했던 선수,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후배를 챙겼던 야구계의 큰 형님. 그의 발자취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면으로 못다 한 '부산피디아 최동원'의 이야기는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youtube.com/@TheBusanilbo)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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