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필리핀 바다서 기적 만들어 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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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 해양경찰청장

"해경 창설 70년 만에 첫 해외 방제 지원"


김종욱 해양경찰청장 김종욱 해양경찰청장

바다는 지구 표면의 70.8%를 차지하며, 육지 면적의 약 2.4배에 달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태계이며, 인류 생활과 경제 활동의 중요한 터전이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오염 물질은 해양으로 유출돼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해양 생태계를 변화시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선박 해양 오염 사고가 일어나면 국경을 초월하여 국제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이유다.

올해 2월 28일, 필리핀 민도로섬 북동쪽 해상에서 기름 800t을 실은 ‘프린세스 엠프레스호’(500t급 유조선, 필리핀 선적)가 침몰했다. 선박에 실린 기름이 유출되면서, 인근 바다와 해안을 심각하게 오염했다. 필리핀 정부는 방제 자재가 충분하지 않아 코코넛 나뭇잎으로 기름을 닦을 정도로 애를 먹었다. 사고 해역 주변 어민은 어업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주민들도 관광객이 끊겨 생계가 어렵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 일본과 함께 필리핀 해양 오염 방제를 도운 세 번째 국가로 국위를 선양했다. 우리나라에서 현장에 파견된 긴급방제팀은 허베이스트리트호, 우이산호 등 국내 오염 사고 방제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됐으며, 필리핀 현지에서 미국·일본에서 파견된 국제방제팀과 협력해 지원 활동을 펼쳤다. 필리핀과의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고, 국제적으로 한국의 뛰어난 방제 역량을 알릴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해양경찰청을 창설한 지 70년 만에 첫 해외 방제 지원이다. 외교부와 힘을 모아 지원을 결정하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기후 위기 시대에 탄소 흡수원을 보호하는 일은 모든 국가가 함께해야 하는 가치가 됐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는 이번 사고로 1626ha 규모의 맹그로브 숲과 362ha 규모의 수중 식물 서식지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곳은 ‘블루카본의 보고’로 불릴 만큼 기후 변화를 막을 탄소 흡수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자원을 잃는다면 필리핀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인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재난에 처한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인도적 지원 결정이다. 우리나라는 2007년에 태안 유류 오염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재가 부족해 볏짚이나 헌옷을 모아 기름을 닦아냈다. 미국, 캐나다는 방제 전문가를 보내 기술을, 일본과 중국은 유흡착재를 지원했다. 123만 자원봉사자와 함께 ‘태안의 기적’을 이뤄낸 조력자였다.

해양경찰청은 필리핀에 유흡착재 20t 등 방제 자재를 지원했다. 방제 전문가로 구성한 긴급방제팀도 파견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필리핀 해양경찰과 함께 방제 작업을 했으며, 미국 코스트 가드(USCG), 국제유조선선주오염연맹(ITOPF)에서 지원 온 민관 전문가와 협력해 방제 기술과 방법을 조언하기도 했다. 필리핀 코스트 가드 사령관 아르테미오 아부 제독은 필리핀 국영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의 방제 자원과 기술 지원이 해양 환경 재난을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작업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날씨는 덥고, 습했다. 조금만 서 있어도 땀이 맺혔다. 자원봉사자들은 자재가 부족해 유흡착재를 대신해 나뭇잎과 같은 재료로 기름을 닦았다. 주민들은 오염이 심한 맹그로브 숲을 구하려고 밀림을 헤치고, 해발 300m 되는 산을 넘어가서 방제 작업을 했다. 필리핀에서도 주민과 자원봉사자가 역경을 이겨 내고 ‘필리핀의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우리 해양경찰도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기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탰다.

일주일간의 필리핀 지원을 마친 긴급방제팀원들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우리나라를 대표해 필리핀을 돕고, 지구 환경을 보전하는 데 이바지한 자긍심 때문일 것이다. 긴급방제팀이 떠난 일주일 사이 우리 청사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기억이 생생하다. 예년보다 일주일이나 빨랐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 때문일 것이다. 벚꽃이 피고 질 때면 필리핀 바다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필리핀 국민과 그 현장에 함께했던 그들이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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