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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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주)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주) 제공

1980년대 한국에선 미혼모의 아이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혼모 ‘소영’은 연고도 없는 나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로 간 소영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어린 아들 ‘동현’과 소박하게나마 행복한 나날을 꾸려간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소영을 성희롱하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김밥을 도시락으로 싸 온 동현에게 또래들은 ‘라이스보이’라 놀리며 인종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소영은 가만히 당하거나 우는 약한 여성이 아니다. 어눌하지만 단호하게 다시는 자신을 희롱하지 말라고 말하며, 아들에게도 누가 놀리거나 괴롭히면 때려 버리라고 일러준다. 동현은 엄마가 알려준 대로 자신을 괴롭힌 아이에게 폭력으로 응징한다. 그러나 학교는 차별보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나쁜 행동이라고 규정하며 동현에게 정학 처분을 내린다. 소영은 차별과 처벌을 아무렇지 않게 내리는 학교나 선생들의 처신에 화가 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Riceboy Sleeps)’는 모자(母子)가 겪는 차별을 덤덤히 그려낸다.

미혼모 소영과 아들 동현 이야기

덤덤히 담은 ‘라이스보이 슬립스’

캐나다에서 겪는 차별 등 그려

앤소니 심 감독 반자전적 영화

9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동현은 16살이 된다. 인종차별을 겪던 동현은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파란색 렌즈를 착용하고 다닌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동현은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아이로 변해있다. 어딘지 불안해 보였던 소영도 남자친구가 생기는 등 두 사람의 이민 생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소영이 쉬는 시간에 공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여성들이 둘러앉아 있는 순간 한 여성이 자기 아들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줄 거라며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을 짓기가 쉽지 않다. 데이비드는 동현의 이름이고, 마이클이나 톰은 또 다른 동료의 아들 이름이기 때문이다. 작은 동네에서 아들들 이름이 같은 것도 낭패가 아닌가. 서로 합의해서 이름을 짓는 이 장면은 재미있다. 한국에서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고, 또 그 이름은 곧 한 사람의 뿌리(정체성)를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영어’ 이름을 짓는 행위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다름없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데이비드가 아닌, ‘동현’이란 이름을 궁금하게 만든다. 달리 말해 감독은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통해 데이비드가 아니라 동현의 이야기, 동현의 뿌리를 찾아가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동현은 거울을 보며 자기 눈 양 끝을 늘리거나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친구들과 다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늘려도,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도, 서양인이 먹는 음식을 먹어도 그들과 같아질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진다. 바로 그때 소영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나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아빠의 이야기. 소영은 동현을 데리고 고국 한국으로 간다. 모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정. 동현의 정체성 찾기를 무심히 따르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4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계 캐나다인 앤소니 심 감독의 반자전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은 “나의 뿌리인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밝히며 각본과 제작, 편집에 참여했다. 그는 소영의 남자친구 역할까지 맡으며 웰메이드 드라마를 완성한다. 특히 16㎜ 필름으로 찍은 영화 속 영상은 한 폭의 회화처럼 아련하고 그리운, 그 어떤 정서로 빠져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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