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사라진 그래피티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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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2003년 개봉한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오대수가 15년간의 감금에서 풀려나 동네 양아치들과 처음으로 싸움을 하던 장소는 부산 온천천이었다. 온천천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큰 역할을 했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미국 갱들이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으니 적절한 로케이션이었다. 당시 부산도시철도 온천장역에서 장전동역까지 그려진 온천천 그래피티는 국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그래피티 공간으로 해외에도 소개되었다. 온천천 그래피티 구역은 2010년 온천천 재개발 공사로 대부분 사라졌다.

수영구 민락어민활어집판장 주차타워에 그려진 그래피티 벽화 ‘나이 든 어민의 얼굴’도 사라졌다. 지난해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손상된 주차타워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그래피티 작업 특성상 오랜 시간 보존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사유재산에 그려진 그림이라 유지를 강제하지 못하는 상황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56m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독일 출신 작가 헨드릭 바이키르히 또한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반열에 올라섰기에 섭섭한 마음이다.

주류 예술이 아니었던 그래피티는 오랜 시간 찬밥 신세였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뱅크시, 키스 해링, 티에리 구에타 등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은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다투어 소장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지금껏 정체불명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지난해에는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신작 7점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키이우 인근 보로디안카의 폐허가 된 건물 벽면에는 어린 소년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닮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유도 업어치기를 하듯이 패대기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우크라이나에서 우표로도 발행됐다.

리본을 흔드는 리듬 체조 선수를 묘사한 뱅크시의 다른 작품은 키이우 전선의 최대 격전지인 이르핀에 그려졌다. 문제는 이 건물이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를 앞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 당국은 벽화가 그려진 면을 유리 액자와 경보 알람으로 보호해 보존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편 지난달에는 영국 시골의 오래된 농가 2층 외벽에 뱅크시 작품이 있었는데, 땅 주인이 이를 모른 채 집을 허물어 수십억 원의 가치를 날렸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나이 든 어부가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을 이제는 못 본다는 사실이 아쉽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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