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돌려차기’ 피해자 “감옥 속 그는 내 모든 걸 아는데, 감옥 밖 나는 아는 게 없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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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가 된 피해자] 상. 부산 돌려차기 사건

1년 전 영문 모르고 폭행당한 뒤
사건 당사자지만 전 과정서 배제
신문 기사 보고서야 전말 파악
민사소송 걸어서야 CCTV 확보
가해자 출소 뒤 해코지할까 겁나
불안 속에 살지만 대책 전혀 없어

부산 돌려차기 사건 당시 범행을 묘사한 일러스트. 피해자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 당시 범행을 묘사한 일러스트. 피해자 제공

만일.

살인 청부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편지로, 전화로, 문자로 평생 협박받게 되는 건 아닐까. 인터넷 회원으로 가입할 때 쓴 주소가 가해자의 손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외출할 땐 뒤를 밟히지 않을까. 가해자가 12년 뒤 출소하고 불쑥, 잊고 살던 일상에 다시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지난해 5월 22일. 그날 이후 1년 내내 박민지(28·가명) 씨는 수백 가지 ‘만일’을 상상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불쑥 벌어진 사건이었다. 민지 씨는 여전히 일상에서 가해자가 돌아와 보복하는 ‘만일’을 생각한다.

대책은 민지 씨 몫이었다. 수사기관에서는 기초적인 지원 외에 실질적 신변 보호에 대한 설명조차 없었다. 사건 당사자였지만 수사, 기소, 선고에 이르기까지 사건에서 배제됐다.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을 안고 민사소송을 겨우 걸고 나서야 사건의 CCTV를 볼 수 있었다. ‘출소하면 복수하겠다’는 가해자의 보복 의사를 전해 들었지만 대책은 없다. 민지 씨는 홀로 ‘만일’을 대비한다. 그는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다.

① 2022년 5월 22일 사건

집 근처에서 거리 공연을 보는 것이 민지 씨의 취미였다. 서면 한복판 번화가였다. 사람이 많았고 조명도 밝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30대 남성 이 모 씨가 민지 씨의 뒤를 밟았다. 이 씨는 오피스텔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민지 씨의 뒤통수를 발로 돌려찼다. 쓰러진 민지 씨를 발로 다섯 차례 폭행한 뒤 구석으로 끌고 갔다.

민지 씨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 이 씨는 CCTV 사각지대에서 7분여간 나름의 구조 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지 씨를 처음 발견한 이웃 주민은 상의는 갈비뼈, 하의는 골반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벗겨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씨는 ‘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빴다’고 범행 이유를 밝혔지만, 성범죄 의도 정황이 곳곳에 또렷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이 사고 직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습. 최근 항소심 재판부는 성범죄 의도를 가리기 위해 DNA 재감정 실시를 결정했다. 피해자 측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이 사고 직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습. 최근 항소심 재판부는 성범죄 의도를 가리기 위해 DNA 재감정 실시를 결정했다. 피해자 측 제공

② 2022년 5월 24일 방치

이틀 만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민지 씨는 기사로 처음 사건 전말을 알았다. 〈부산일보〉는 이날 ‘[단독] 서면 한복판서 귀가하던 여성 무차별 폭행’ 기사를 보도했다. 민지 씨는 보도를 보고 그에게 일어난 일을 퍼즐 맞추듯 되짚었다. 이 씨가 사흘 동안 도주하다 체포됐다는 사실도, 경찰에서 ‘째려봐서 기분 나빠 때렸다’고 진술한 사실도, 혐의가 상해에서 살인미수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모두 언론을 통해 처음 알았다. 민지 씨는 “보도가 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무도 제게 말해 주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사건 직후 경찰에서는 기초적인 피해 회복 지원에 나섰다. 병원 치료비와 구조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사건은 곧 경찰에서 검찰로,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갔다. 지원 시스템은 그때마다 단절됐다. 결국 민지 씨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됐다. 민지 씨는 “당장 밤길이 두려운데 스마트워치나 전자발찌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곳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 당사자에게 사건을 설명해 주는 이도, 사건 직후 대처법을 안내해 주는 이도 없었다. 민지 씨는 방치됐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 피해자 측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 피해자 측 제공

③ 2022년 7월 19일 배제

부산지법 형사6부는 두 달 뒤인 7월 19일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첫 공판을 열었다. 민지 씨는 이곳에서 처음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다. 지인의 만류에도 민지 씨는 법원 방청석에 앉았다. 그때까지 피고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민지 씨가 알고 있던 사건의 전말이라고는 검찰에서 보내 준 1~2장짜리 공소장이 전부였다. 민지 씨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인물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 공판에서 검찰은 사건 당시 CCTV 영상을 재생했다. 민지 씨는 법정에서 CCTV 사각지대로 옮겨진 뒤 7분의 공백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의 옷이 상당 부분 벗겨져 있다는 것도 영상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었다. 경찰에 증거열람을 요청했지만, 사건의 결론이 나지 않았고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국선변호사를 선임할 기회도 없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성폭력 등 특정 사건에서만 선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증거를 확보할 골든타임을 놓쳤다.

사건 당사자가 철저히 사건에서 배제된 법정에 결국 민지 씨가 직접 나섰다. 나서지 않으면 사건이 묻히겠다고 생각했다. 사건 자료를 확보할 방법은 민사뿐이었다. 형사소송은 검찰과 피고인 간 싸움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철저히 제3자가 된다. 사건 정보는 검찰에게만 넘어가 피해자는 알 수 없다.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을 제기한 원고로서 피고인 가해자 이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민지 씨는 이 씨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고 그제야 사건의 자료를 법원으로부터 받았다. 돌고 돌아 사건 두 달여 만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 피해자 측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머리와 다리 등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피해 여성. 피해자 측 제공

④ 2023년 4월 10일 노출

그때까진 몰랐다. 민사에 맹점이 있다는 것을 민지 씨에게 말해 준 이가 없었다. 1심 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이 씨의 구치소 동기라는 인물에게서 충격적인 발언을 전해 들었다. 이 씨가 구치소 안에서 민지 씨의 오피스텔 주소와 이름을 계속 웅얼거리며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민지 씨는 개인정보가 이 씨의 손에 어떤 경로로 들어갔는지 샅샅이 되짚었다. 확인할 방법은 없었으나 민사소송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민지 씨는 이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민사소송은 소를 제기한 원고의 인적 사항이 소장에 기재돼 피고에게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가 피고인 가해자에게 노출될 수 있다. 법률 대리인을 통하는 방법 등이 있지만 민지 씨는 몰랐다. 민지 씨는 “피해자가 나서야만 자신의 사건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사건을 알고 싶으면 가장 민감한 피해자 신원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⑤ 2023년 5월 3일 ~ 불안

“왜 피해자가 숨어 살아야 하는 건가요. 더 이상 불안해지고 싶지 않아요.”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민지 씨는 여전히 혼자서 ‘만일’을 대비한다. 대책을 찾아야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내내 ‘피해회복은 셀프인가’라고 되뇌었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로 수천 번 되돌아갔다. 옷차림이 문제였나, 너무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녀서 그렇게 된 건가, 휴대폰을 쳐다보지 않았어야 했나. 이름까지 탓했다. 고난을 거쳐 대성한다는 이름의 팔자 탓인가 싶어 개명도 결심했다.

민지 씨는 “몇 장짜리 법원 판결문을 받기 위해서 피해자는 길게는 수년간 끔찍한 순간에 머물러 산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범행을 피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게 된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밤이 걸쳐지는 모든 일이 아직도 두렵다. 어둑한 시간이면 지인이 집 앞까지 데려다 줘야 귀가할 수 있다. 어느새 해가 졌는데 곁에 사람이 없어 혼자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려 길거리에 한참 서 있기만 했다. 아직도 1년 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민지 씨는 그러나 “언젠가는 밤에도 데려다 줄 친구 없이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밤에 혼자서도 귀가를 할 수 있게 되려고 민지 씨는 공부하고 목소리를 낸다. 1년 내내 사건 자료를 분석하고 법, 제도를 뒤지고 범죄 심리학을 공부했더니 지금은 거의 전문가가 됐다.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먼저 알리고 다른 피해자와 연대에도 선뜻 나섰다.

민지 씨는 “사건 초기에는 ‘차라리 죽었다면’ 하는 생각도 했다. 파장이 크면 대책도 빨리 마련됐을 텐데, 싶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기적’이라고 할 만큼 부상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만큼 안 숨고 끝까지 싸우려고 한다. 피해자가 숨을 일이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한편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부산고법 형사2-1부(부장판사 최환) 심리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 공판에서 최초 목격자인 이웃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민지 씨의 속옷과 청바지에 대한 DNA 재감정을 결정했다. 최초 목격자의 증언과 DNA 재감정 결과에 따라 이 씨가 성범죄 목적을 갖고 살인미수 범행을 저질렀는지 여부 등을 판가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씨는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지만 양형 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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