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간송 전형필은 우리 역사 지키려는 대의 품고 문화재 모아”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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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산 간송미술관 학예실장
제16기 부일CEO아카데미 강연
‘간송 선생의 삶과 소장품’ 주제
“민족 수호자의 덕망 본받아야”

“간송 전형필(1906~62)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겠다는 ‘문화보국’ 정신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간송미술관 백인산 학예실장은 “간송 전형필은 문화재가 곧 역사와 문화라는 신념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해 한국의 얼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백 실장은 지난 2일 부산 부산진구 롯데호텔부산 3층 펄룸에서 진행된 ‘제16기 부산일보CEO아카데미’ 1학기 제8강의에서 ‘간송 선생의 삶과 소장품’을 주제로 이같이 역설했다. 백 실장은 “간송은 문화재 속에 들어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켜 내겠다는 대의를 품고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간송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가를 넘어선 ‘민족문화 수호자’였다. 일제강점기 대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간송은 고유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을 갖고 문화재를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문화재라면 가격이 얼마든 신경 쓰지 않고 전 재산을 투입해 사들였다.

1935년 간송은 일본 골동상인 마에다에게 고려 최고 상감청자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을 당시로서는 거액인 2만 원을 들여 구입했다. 당시 괜찮은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20배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최대 미술품 매매 기관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다시 한 번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다. 매물로 나온 조선의 대표 명품 백자를 1만 4580원이라는 거금을 불러 낙찰받는다. 당시 경매 경쟁 상대는 일본 야마나카 상회로, 동양의 미술품들을 유럽과 미국에 팔아 막대한 차액을 남기던 회사였다. 백 실장은 막대한 거금을 들이면서 한국의 문화재를 지켜 내려는 간송의 열정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백 실장은 “당시 신문 기사에 조선의 청년이 일본 최고의 상회를 이겼다고 나온다. 분야를 막론하고 일제 강점기 일본을 누르는 사건이 있으면 큰 화제가 됐다”며 “간송이 최고의 청자와 백자 등을 품으면서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간송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의 예술 작품과 문화를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비롯해 세종의 고손인 이정,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의 작품 등 후대를 위해 한국의 미를 보존하고 남기는 데 혼신을 다했다. 간송은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난 올 때도 훈민정음을 품에 놓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의 모든 문화재에 간송의 희생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 실장은 간송이라는 한 사람이 한국의 문화를 지켜 내는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강조했다. 백 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은 어느 한 사람의 덕망의 힘이 때에 따라 클 수 있다는 점을 간송이 몸소 실천해 보여줬다고 밝히기도 했다”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간송의 삶처럼, 한 사람의 덕망의 힘이 이렇게 클 수도 있다는 점을 사회에 널리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강의를 마쳤다.

이날 강연에 나선 백 실장은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미술사학자이다. 백 실장은 고려대 겸임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등을 지냈고 2018년 ‘제2회 혜곡 최순우상’ 수상자로도 선정된 바 있다. 저서로는 〈조선의 묵죽〉 〈간송미술 36〉 등이 있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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