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운명의 돌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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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오는 6일(현지 시간)로 다가오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후 70년 만에 열리는 세기의 행사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영연방 내 국왕에 대한 호감도가 갈수록 예전만 못하고 또 영국 내에서도 대관식에 들어가는 엄청난 세금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대관식 의례 자체는 보기 드문 구경거리임이 분명하다.

대관식을 앞두고 그동안 일반인이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왕실 보물들도 눈길을 끌고 있는데, 그중 다소 이색적인 물건이 눈에 도드라진다. 철저한 보안 속에 국보 이상으로 신성한 취급을 받는 일명 ‘운명의 돌’이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돌덩이 같은데, 영연방 수장의 왕권을 상징한다고 하니 언뜻 무슨 연유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스콘 석(Stone of Scone)’으로도 불리는 이 돌은 길이 66㎝, 너비 43㎝, 높이 27㎝에 무게 150㎏의 붉은 사암으로, 9세기 초부터 스코틀랜드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됐다고 한다. 그런데 1296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전리품으로 빼앗은 뒤 잉글랜드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되다가 1996년 스코틀랜드로 영구 반환됐다. 단서는 영국 국왕 대관식 때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온다는 조건.

그런데 애초 이 돌은 어떻게 귀한 물건이 됐을까. 이야기는 구약 창세기의 야곱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벧엘이라는 곳에서 잤는데, 그때 베개로 삼았던 물건이 바로 이 돌이라고 한다. 야곱은 이 돌을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개과천선했고, 이 돌은 이후 전란 등을 틈타 스코틀랜드로 옮겨져 ‘성물’로 취급됐다. 결국 인간사의 많은 이야기가 이 돌을 중심으로 엮이면서 차츰 권위의 상징으로 변모해 간 게 아닌가 싶다.

얼핏 보면 21세기 첨단 문명국가가 하나의 자연물에 불과한 돌에 그토록 신성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신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첨단과학 시대라고 해도, 원시 때부터 형성된 인간의 오랜 무의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돌에 새겨진 무의식이라고 할까. “돌은 한 인간의 생애보다 장구한 인간사 숱한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 무정물이면서 유정하다”는 이성희 시인의 말에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도 유명한 수필집 〈돌의 미학〉에서 “돌에도 피가 돈다”라고 말했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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