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스카이라인이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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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풍경 완성하는 결정적 역할은
주변 배경과 어우러짐에 있어

지하에서 지하로 주차장 이동
차창 밖까지 건물에 둘러싸여
하늘 보며 출근하던 기억 옛말

합의 없는 도시 만드는 이들에
스카이라인 바꿀 권리 있는가

오래전 건축 공부를 시작할 때 부딪힌 멋진 단어 중의 하나가 ‘스카이라인(sky line)’이었다. 짙은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보았을 때의 느낌처럼 맑고 신선했다. 넓고 큰 것으로만 생각하던 하늘이 아름다운 선을 이루고 있었다니? 학습의 결과, 그것은 하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집과 산과 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후 모든 풍경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풍경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만의 모습이 아니라,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배경과 어우러짐에 있다는 것을. 광안대교를 바라볼 때가 그랬고. 충혼탑을 올려다볼 때도 그랬다. 요즈음 그림을 그리면서 깨우친 것 또한 그런 이치다. 사물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은 사물 자체의 묘사가 아니라, 그 주위를 이루고 있는 것의 명도와 채도와 세밀함에 좌우된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출근길에 하늘을 보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층에서부터 차를 출발하고부터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스카이라인이란 말을 잊은 지도 꽤 오래다. 주말에 가끔 교외로 나가 숨통을 틔우는 일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은 탓이 더 크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어쩌다 마음먹고 하늘을 보려 하였지만 여긴 힘든 게 아니다. 차창 밖이 모두 건물로 둘러싸여 버렸고, 그나마 트여 있던 도로 모퉁이마저 다 막혀 버린 게 아닌가?

해운대에서 대연동 쪽으로 출근하려면, 여러 번 운전대를 돌려야 한다. 도로에 곡각 지점이 많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이 어쩌면 이 도시의 큰 매력일지 모른다. 그때마다 펼쳐지는 도시의 소소한 변화와 그것들이 하늘과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풍경은 내 출근길의 큰 활력소가 되곤 하였다.

오래전 출근길의 스카이라인을 추억한다. 내 발에서 시작하여 건물과 산을 거쳐 하늘에 이르는 과정의 상상은 가끔 아파트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요즈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고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도시풍경이 때론 공허하다면, 하늘이 함께 보이던 그때 출근길 거리의 풍경은 매우 분주하고 다양하여 늘 활력에 넘쳤었다. ‘어이 친구. 오늘도 파이팅!’ 그런 말이 들렸던 것 같다. 이 도시와 거리가 늘 내게 던져주던 위무의 말이었다.

도로 모퉁이마다 크나큰 아파트가 하늘을 막고, 이상한 이름을 한 브랜드의 로고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자비한 건설족들과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행정을 원망하고 있다. ‘스카이라인을 송두리째 바꿀 권리가 그대들에게 있었소?’

우리가 자본주의를 선택하고부터 도시는 어디까지나 사유(私有)의 집합체였으며, 얼기설기 얽혀있는 개인의 가치들은 도시적 풍경에 대한 합의를 좀체 허용치 않았다. 땅을 나눌 때부터 베풂과 공유와는 이미 거리가 생겼다. 모두 제 땅 가지기와 거기를 채우기에 혈안이다.

이른바 ‘도시풍경’이란 단어는 익숙하지만, 그것을 만들어 가는 데에 우리는 여전히 서툴다. 남의 일처럼 여겨 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도시의 풍경을 이루어 가는 근원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은 도시 구성원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하물며 건설 관계자들에게는. 자본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과 이웃의 입장으로 길모퉁이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기 바란다. ‘아~ 이 땅에 집을 지어선 안 되겠군.’ 그래야 명품 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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