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221) 실재와 재현 사이, 한운성 ‘Blue St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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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운성(1946~)은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작업 초기에 작가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확산되었던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Informel) 경향의 추상 회화를 제작했다. 이후 1970년대 초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템플대학교의 타일러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이를 계기로 한운성은 일상의 사물을 주제로 한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선보였다.

1980년대부터 작가는 받침목, 매듭, 문 등 주변의 건축·구조적 요소나 과일, 꽃과 같이 평범하면서도 친근한 소재를 담은 다양한 연작을 발표했다. 특히 회화와 판화를 오가는 활동으로, 평면 매체의 본질에 관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1980년 제2회 동아미술제 대상, 1980년 제1회 공간 국제소형판화전 우수상, 1981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했으며, 덕성여자대학교 및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운성은 2011년부터 국내외 관광 명소의 모습을 연극 가설무대처럼 표현한 ‘디지로그(Digilog)’ 연작을 선보였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이 연작의 제목은 사진 기록을 회화로 다시 옮겨내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가 영국 어느 대학의 졸업전시회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던 일화에서 출발한다. 당시 그는 대학 측이 숙소로 제공한 호텔의 낡은 외관에 실망했고, 귀국 후에야 그곳이 유서 깊은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사물을 외형으로만 판단했음을 깨달은 작가는 이후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회화로 재현하면서 이 둘의 간극을 드러내고자 했다. “사진이 제공하는 정보만으로 작업하였을 때, 실제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은 사진의 평면 위에 기록되어 있는 평면의 껍질뿐”이라는 언급처럼 작가는 실체와 허상이 충돌하는 듯한 독특한 이미지를 화면 안에 만들어 낸다.

‘Blue Stairs’는 한운성이 2011년부터 제작한 ‘디지로그’ 연작 중 한 점이다. 2016년 작품으로 여름날의 오후인 듯 선명한 햇살에 긴 그림자가 떨어진 어느 마을의 골목 한 켠을 담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새파란 벽면과 계단, 갈라지고 덧댄 흔적이 역력한 콘크리트 길목. 작가가 카메라를 통해 마주했을 특정 시점의 풍경이 보인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장면을 비현실적으로 낯설게 만드는 것은 화면을 좌우로 길게 가로지르는 흰 여백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대상과 대조를 이루는 텅 빈 공간을 통해 작가는 사진과 회화, 실재와 재현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면서 시각적 이미지와 경험의 허구성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선주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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