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 대통령의 영어 연설과 용기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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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외국어로 말하는 것 누구나 두려워
지위 높고, 유명할수록 부담 더 커져
윤 대통령 영어로 엑스포 유치 PT
회원국 공감, 호소력 높이는 효과
부산 이미 ‘엑스포 가능 도시’로 승격
추진 의지와 결기로 끝까지 달려가야

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파리 이시레몰리노의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장에서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파리 이시레몰리노의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장에서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일보가 영어 라디오 공중파 방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일보는 2009년 3월 갓 개국한 부산영어방송(e-FM)에서 시사토크쇼 ‘레츠토크부산’(Let‘s talk Busan) 프로그램을 매주 자체 제작했다. 트레일러를 운전했지만, 하여튼 카투사 출신인 점, 1년 6개월의 미국 연수 경험 등으로 ‘영어 특기자’로 차출돼 토크쇼 PD를 맡아 직접 방송 출연까지 했다. 3월 1일 첫 방송, ‘부산과 후쿠오카의 초광역경제권’이란 주제를 놓고, 미국 유학 경험이 풍부했던 장제국 동서대 총장(부산-후쿠오카포럼 간사), 부산시장 영어 통역까지 했던 전나용 부산시 주무관, 그리고 PD 겸 기자인 필자 등 3명이 1시간 동안 영어로 토크쇼를 진행했다. 1달간 비밀과외까지 받았지만, 방송 내내 머리를 원고에 박고 진땀 흘린 기억밖에 없을 정도였다.


매주 영어 토크쇼 제작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토론자 섭외였다. 부산에도 각 분야에 유학파들이 많지만, 대부분 영어 논문을 읽고 쓸 정도이지, 대중이나 생방송 마이크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섭외해도 손사래 치기가 바빴다. 그만큼 외국어는 물론이고 모국어로도 대중 앞에 서면 떨리기 십상이다. 전설적인 아나운서들도 대종상 같은 큰 무대에 서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떠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명해질수록, 나이가 들수록, 기대가 클수록 대중 앞에 서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프랑스 파리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대한민국의 약속’을 주제로 영어 프레젠테이션(PT)을 직접 했다. 미국 버클리음대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강남스타일’의 가수 싸이에 이어 무대에 올랐다. 윤 대통령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대한민국을 경제 강국으로 변모시킨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겠다”면서 “2030년 부산에서 만나자”고 강조했다. 유학이나 해외 근무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이 영어로 전 세계 국가 대표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은 대통령이기에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부담이 많고,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통역을 통해 화려한 의사 전달도 가능했겠지만, 심사위원은 대통령의 완벽하지 않은 영어 발음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성을 느꼈을 터이다.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국가수반이 그들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효과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단한 성의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어의 ‘다가가는 힘’이기도 하다. 역지사지로 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한국어로 연설을 한다면 더 큰 박수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소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올해 말 엑스포 유치에 성공하면 해피엔딩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부산은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야당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파리 현장에서 돌아온 유치위원들은 아직 경쟁 도시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고 입을 모은다. 6개월 늦게 뛰어든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뒤엎을 핵심은 국가의 진정성과 추진 의지다. 대통령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이란 용기는 국내 기업 총수들에게도 더 뛸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유치 운동에 미온적이던 정치인, 기업인, 서울 언론인 등에게 ‘다 같이 뛰는구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효과도 낳았다. 2030엑스포 유치는 부산만의 지역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팀으로 총집결하는 국가 축제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그런 태도와 용기, 진정성이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11월 마지막 프레젠테이션과 BIE 회원국의 투표가 남아 있다. 부산과 대한민국은 끝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 고개를 넘어서야 다음, 그다음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기약할 수 있다. 물론, 부산으로서는 도시 브랜드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기회도 됐다. ‘부산’이란 단어가 싸이, 조수미, SK·현대·삼성 등 민간유치위원회에 참여한 12개 기업 총수의 입에서 잠꼬대처럼 나오는 자체가 성과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부산에 대한 학습과 이해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미 부산은 ‘엑스포를 치를 수 있는 세계 도시’로 올라선 셈이다. 유치 활동에서 얻게 된 부수적인 성과이다.

윤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진정성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파리 영어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줬던 그 추진 의지와 결기, 용기를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폭발적인 국가 에너지와 국민의 용기, 기업의 네트워크가 결집한다면 Mr. Everything(미스터 에브리띵)이란 사우디의 오일 머니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 여름,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뛰는 모든 사람을 뜨겁게 응원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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