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타이탄 참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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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억만장자만 주목, 난민 재난은 무관심
민족국가 밖에서 개인의 자유 찾는 건 만용
내부 불평등 해결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

내로라하는 억만장자들이 탄 심해 탐사 잠수정 타이탄 실종 사건이 결국 탑승자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사라진 잠수정을 각종 장비를 동원해서 수색하고 있던 그 무렵에 유럽으로 탈출하던 난민을 태운 어선이 지중해에서 침몰했다. 사망이 확인된 이들만 80명이고 다행히 구조된 이들도 100여 명에 이르지만, 총 탑승 추정 인원은 750명이었다고 한다. 이 둘을 비교하면서 세간의 관심이 억만장자의 생사 여부에만 쏠려 있고 난민의 재난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비극은 서로 대립하는 조건에서 일어난 재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거부와 당장 먹고살 길이 없어서 위험한 어선에 몸을 실은 난민들을 같은 부류로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탑승자 전원 사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뒤에 잠수정을 보유하고 여행 상품을 기획한 오션게이트는 한화 3억 2000만 원에 달하는 경비를 지급한 억만장자들을 일컬어 “세계의 해양을 탐험하고 보호하려는 열정”을 가진 이들이라고 추모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 짧은 문장은 ‘탐험’과 ‘보호’라는 양립 불가능한 분열의 열정을 보여 준다. 해양을 탐험하는 행위가 어떻게 해양을 보호하는 행위와 같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분열증을 타이탄과 난민 보트를 대립시켜서 보도하는 서방 언론의 태도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보도는 마치 난민의 재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리 모두’의 무책임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난민에 대한 만연한 무관심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비극적 사건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도덕적 불감증을 질타하기보다 두 사건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적 문제이다. 억만장자와 난민을 서로 대비시키는 비판의식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형식주의적 도식화를 넘어서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난민이 아니라 억만장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 그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타이탄과 난민 보트는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같은 조건 위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건이다. 이 조건은 다름 아닌 민족국가이다. 타이탄 여행 상품을 기획하고 운영한 오션게이트의 창립자 스톡턴 러시는 심해 탐사에 대한 정부 규제를 우습게 여긴 자유 지상주의의 신봉자였고, 규제가 창의성을 죽인다고 믿었던 사업가였다. 2022년 팟캐스트에서 러시는 “안전은 순전히 낭비”라고 말하면서 안전하기를 바란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가장 안전하겠지만, 그런 이들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얼핏 창조경제라는 주박(呪縛·저주 혹은 굴레)이 만연한 시대에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러시는 안전하기 위해 모험을 하지 않는 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난민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은 외눈박이의 편협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의 터전을 떠나 밀항을 시도했다 참변을 당한 난민들은 안전한 삶을 과감히 걷어차고 모험을 하고 싶어서 위험한 보트에 올랐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처지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따라서 러시의 논리는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러시의 주장은 난민의 존재 조건이기도 한 민족국가에 대한 질문을 은폐하는 거짓 문제이다.

타이탄의 참사는 민족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모험이 가능하리라는 착각에서 빚어진 재난이다. 아무리 값비싼 비용을 치르더라도 민족국가를 이탈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위험성을 피해 가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오션게이트는 어떤 민족국가의 간섭도 미치지 않는 공해에서 이익을 취했다. 명분은 심해 탐사였지만 사실은 특정 상류층 한정 관광 상품을 팔았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해양은 더 이상 과거처럼 자유의 공간이 아니었지만, 이들은 근대의 합의를 거부하고 자기들만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이들이 자유의 공간이라고 믿었던 해양은 그러나 민족국가에 머물 수 없는 난민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부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근대의 산물인 민족국가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그 바깥에서 개인의 자유를 찾으려는 행동은 만용에 불과하다는 진실일 것이다. 구성원의 평등을 절대적 원칙으로 삼고 출발한 민족국가가 결과적으로 불평등의 재생산을 낳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는 모험보다 그 내부에서 더 많은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난민과 같은 민족국가의 또 다른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는 최선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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