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혐오보다 사랑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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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조교수

꽤 오래전 일이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아들이 어느 날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나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랑 결혼할 거야.” 좋아하던 여자친구랑 헤어진다고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밤 베갯잇을 적시며 눈물을 찔끔거리던 어린 꼬마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애정 상대가 남자친구로 바뀌었네! “그렇구나. 그렇게 ○○가 좋니? 근데 남자끼리는 결혼 못 하는데 어쩌지?” 너무 진지한 아들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응, 걱정 마. 미국 가서 하면 돼. 미국에서는 남자끼리도 결혼할 수 있대.” 꼬맹이가 참 모르는 게 없네 싶어 한참 웃었다.

내겐 그냥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성소수자 당사자거나 혹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는커녕, 존재조차 부정당하기 일쑤다. 엊그제 열린 퀴어 축제에도 어김없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이들의 혐오 표현이 나부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싫어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지독한 말이 또 있을까.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한다니.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교리를 갖다 붙인들 이런 말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이 지독한 폭력인 것은 그것이 당사자를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나를 부정하는 폭력의 시선은 단지 외부에만 있지 않고 어느새 스스로의 목소리가 되어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진다. 내가 나를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성소수자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은둔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도록 강요당한다.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을 보냈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 주변의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들은 다들 그런 죽음의 시간을 버텨 낸 생존자들이다. 이 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이 벌이는 축하 잔치가 바로 퀴어 축제다. 반동성애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굳이 저렇게 떠들썩하게 해야 하나 싶어 퀴어 축제가 못마땅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둔 생활이 낳은 고립감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동료들과 소통할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퀴어 축제의 의미는 적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혐오와 폭력의 언어에 대응해 퀴어 축제 참가자들이 내건 슬로건이다. 나를 혐오하는 타자까지 사랑하는 하나님. 이들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혐오와 폭력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돌보는 사랑임을 이들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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