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에 경고하고 피해자 치유한 판사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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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위안 담은 ‘양형 이유’
판결 내용 이례적 SNS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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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랑으로 가족을 보듬기는커녕 조악한 폭력에 의존해서 전근대적 가부장 행위를 일삼아 온 피고인, 나아가 피고인처럼 함부로 살아가는 남성들에게 경종을 울려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부산지법 서부지원 형사2단독 백광균 부장판사는 아동학대 등 혐의로 기소된 A 씨의 판결문 중 ‘양형의 이유’에 이같이 썼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악행과 정신상태에 비춰볼 때 아동학대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하더라도 그 성행을 뜯어고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며 “국가의 소중한 시간, 인력, 예산을 아끼도록 이수 명령은 병과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A 씨는 흉기나 목발 등 위험한 물건으로 7~10세에 불과한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고, 아내를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아이의 독후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흉기로 협박을 일삼았고, 밥주걱에 밥풀이 묻었다며 아이들을 학대하기도 했다. A 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피해자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지만, 법정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사건이다. 빠른 속도로 판결문을 써내지 않으면 다른 사건들이 지체되기에 많은 재판부가 단순한 구조의 사건에서는 양형의 이유를 밝힐 때 전형적인 문구를 자주 쓴다. ‘피해자의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헤아리기 어렵다’거나 ‘피해자가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 등이다.

그러나 백 부장판사는 피해자의 편에서 피해자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양형 이유를 썼고, 피해자 측은 이 판결문에 큰 감명을 받았다. 피해자 측은 판결문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했고, 네티즌들은 ‘판결문을 보고 눈물이 나기는 처음’이라며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피해자 측은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로 망설이는 분들에게 좋은 판례를 알려드리기 위해 글을 남긴다”며 “판결문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판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백 부장판사는 “판결문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남는 문서이기에 그 무게가 다르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물론 많은 분들이 판결문을 보실 수도 있기에 양형 이유에 특히 신경을 쓴다”며 “사건을 검토하면서 빠뜨린 것이 없는지 세심하게 체크하며 판결문을 작성한다.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메시지를 가다듬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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