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무진실(無眞實)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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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원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거짓·허구 이전투구로 아노미 상태
국가 공동체 길 잃고 퇴행만 반복

서울-양평 고속도로·후쿠시마 오염수
진실 규명 대신 정치 공방만 반복

가짜뉴스 일부러 퍼뜨리는 경우도
정치권·전문가·언론 깊은 성찰 절실

우리 사회가 무진실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다. 진실과 사실보다 거짓과 허구가 판치는 이전투구의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짓과 허구의 세상에서 사실과 진실은 빛을 잃고 사라진다. 사실과 진실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규범이 없거나 가치가 혼란스러운 상태인 아노미 상태는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결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거나 사실과 진실에 무관심해 버리게 만든다. 이런 무진실 사회 속에서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은 없으며, 국가 공동체는 길을 잃고 퇴행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딱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우리 정치권에서 사실과 진실은 힘을 잃고 나약하다. 김건희 여사의 땅 투기 여부가 얽힌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문제를 놓고 여야는 진실 공방을 펼치고 있다. 양당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진위는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실과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원래 공당의 자세인데, 양당 중 하나는 사실과 진실을 짓밟고 거짓과 허구, 위선과 허위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국민의 건강과 안전, 수산업 종사자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일본의 오염수 해양 방류가 안전한지 위험한지 여부를 놓고 전면적인 충돌 중이다. 여야가 서로 완전히 다른 사실 판단과 진실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진영 싸움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 규명이다. 국회는 청문회와 공청회 등을 열어 오염수의 안정성 여부를 최종 결정하고 이를 국민에게 공신력 있게 밝히면 된다. 그런데도 여야는 정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거짓과 허구와 과장에 기초한 당론을 중심으로 자당을 지지하는 국민을 집단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

여야가 이렇게 권력의 유불리에만 눈이 멀어 편협한 아귀다툼만 일삼고 있다면, 제정신을 가지고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일은 언론과 전문가와 국민의 몫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과 전문가, 국민 다수가 이념과 진영 싸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문제가 대통령 권력의 땅 투기 스캔들인지 아니면 야당의 정치 공작인지를 밝혀 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언론이 이념과 진영 정치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진실을 밝히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언론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종점 변경 문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정론 직필을 추구해야 할 언론이 이러고 있으니, 우리 언론이 이념과 진영 싸움의 홍위병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안전성 여부가 평행선을 그으면, 과학자들이 모여 검증하고 합의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런 과학적 절차는 제쳐 두고 서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념과 정당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바쁘다. 과학보다 이념과 진영이 먼저인 이들은 과학자가 아닌 못된 정치인에 가깝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려는 국민이 많다. 자신과 같은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과 언론사를 무비판적으로 믿고 따르는 반면, 사실과 진실 판단에는 무관심한 국민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정당이나 언론이 퍼트리는 거짓과 허구에 수동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자진해서 의도적으로 거짓과 허구를 찾아 퍼트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확증 편향과 가짜뉴스 신뢰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국민으로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진실은 탈진실(脫眞實)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이나 진실보다 사람들의 이념이나 신념,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이렇듯 탈진실은 진실은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그 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무진실은 아예 진실이 없고 거짓과 허구와 위선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탈진실 사회가 아니라 더 악성적인 무진실 사회에 가깝다. 무진실 시대는 퇴행의 시대이고 자멸의 시대다. 정치권과 전문가, 언론과 국민이 대한민국을 퇴행과 자멸의 길로 계속 끌고 갈 것인지 아니면 진실과 사실에 기초한 밝은 미래로 이끌 것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다 다 죽는다. 무진실과 이념과 진영 정치의 시대를 끝내고 사실과 진실의 시대를 여는 데 우리 모두가 사력을 다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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