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오시마 만든 ‘옛것 지키며 새것 만드는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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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예술로 재생된 섬’ 탐방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
주민이 참여한 예술 프로젝트
일상·작품 자연스러운 어울림

흔적 지우고 상업공간 들어선
부산의 재생, 새 길 고민 필요

나오시마 베네세하우스 미술관에 있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 ‘시간의 회랑’. 김홍희 제공 나오시마 베네세하우스 미술관에 있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 ‘시간의 회랑’. 김홍희 제공

폐제련소를 미술관으로 만든 이누지마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김홍희 제공 폐제련소를 미술관으로 만든 이누지마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김홍희 제공

부산지역 문화예술인을 주축으로 한 6명이 최근 일본 예술의 섬인 가가와현 나오시마, 데시마, 오카야마현 이누지마를 다녀왔다. 일상의 삶과 예술 작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인문학적 사유를 길어 올린 문화공간 빈빈 김종희 대표의 글을 싣는다.


우리의 삶에 있어 감각과 정서의 즐거움을 동시에 채워주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이방인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아니 나의 사막으로부터 걸어 나와 나를 반란하는 일이다. 어쩌면 나를 향한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여행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곳곳에 숨은그림처럼 웅크린 질문을 발견하는 희열이다.

한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화된 섬이었으나 이젠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예술의 섬인 일본 가가와현 나오시마, 데시마, 오카야마현 이누지마의 3박 4일이 그랬다.

지난 9~12일 김홍희 사진작가, 김민지 예술학 박사,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고영삼 사회학자, 박치과의원 박승영 원장 등 다양한 분야 사람들과 함께한 나오시마 행은 여행의 통념에서 벗어나,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두었다. 나아가 예술의 권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따른 다양한 시각에 대한 교유였다고 할까.


이누지마 안내소 앞에 선 김민지 예술학 박사,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고영삼 사회학자,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왼쪽부터). 김홍희 제공 이누지마 안내소 앞에 선 김민지 예술학 박사,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고영삼 사회학자,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왼쪽부터). 김홍희 제공

반란의 시작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단하게 결박된 언어의 틀이 깨지는 충격이었다. 비유하자면 초음속 비행기의 굉음 같은 놀라움이다. 번잡하게 난립하지 않은, 그러면서 밑바닥으로부터 차분하게 쌓아온 일본의 생활문화와 미적 감각은 그 섬에 대한 일차적 통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가령,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일번지로 등장하는 흔하디흔한 벽화 대신 일상의 삶이 예술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일상과 박리되지 않은 예술, 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드러나게 할 뿐 페인트로 덧칠하지 않는 주거문화를 통해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서 기인함을 새삼 보았다.

그곳에 예술이 있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나오시마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있어서가 아니라,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 있어서가 아니라 옛것을 지우지 않고도 새것을 만들어 내는 예술적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그 땅에서 뿌리 내린 사람의 이야기가 공존하며, 주민이 참여한 예술프로젝트 때문은 아닐까.

사람의 이야기는 역사가 되며 시간은 풍화되면서 문화를 만든다. 인간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C.J 휘트로의 주장처럼 과거의 기억은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현재의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다’는 일차적 경험은 일상성이다. 오감을 통해 다가오는 형상과 인식…. 그러나 일상성을 넘어서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의 ‘어리둥절’은 충격이다. 자연을 끌어들인 안도 다다오의 공간에서 만난 ‘어리둥절’은 빛과 그늘의 오묘한 관계였다. 그 공간의 그늘은 어둠이 아니라 명암이었다.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일렁임으로 보는 사물은 어떤 울림으로 흔들렸다.

오직 감탄사로 만나는 경이로운 때를 숭고라고 했던가. 인간의 언어가 무색해지는 순간. 감탄사조차도 꼬리를 감출 때의 경이로움. 본다는 것조차도 잃어버린 몰아(沒我)의 순간이 예술의 권위라면 나오시마 지추미술관에서 만난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이 그랬다.

예술로 재생된 섬을 걸으며 문득 부산의 오래된 골목이 생각났다. 옛 흔적은 지워지고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자리한 부산의 어느 포구가, 일상의 삶은 뒤로 물러나고 상업공간이 차지한 어느 마을이 나오시마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아니 시원한 대로를 중심으로 나눠진 이쪽과 저쪽의 상이한 생태문화가 집요하게 나를 흔들었다. ‘부산이라 좋다’속에는 마천루 같은 고층 건물도 있으나 퇴락한 문설주, 쑥부쟁이가 제멋대로 자라나는 집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화려한 축제도 있으나 지난한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식은 노을 같은 골목도 있다.

돌이켜보면 과거를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틈은 역시 인간의 상상력이다. 건축적 폐허 위에 핀 일상의 예술과 쓸모 없음 가운데 쓸모 있음을 발견하는 숨통 같은 길을 상상해 보았다. 백 년을 못사는 인간의 서사, 잊히는 것도 잊는 것도 삶이라지만 그럼에도 불멸로 이어지는 것은 무엇보다 예술이 있기 때문일 게다. 오직 손끝의 온기로 읽히는 점자처럼 한 점 한 점 걸어가는 여행의 은유, 그것은 오래된 미래를 향한 순례의 길이다. 멈추지 않을 이야기의 길 위에서 만나는, 새 길이다.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vin02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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