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발사가 의사 대신 수술한 이유는?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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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만나는 의학의 세계/고병수

독일 영화 ‘피지션’의 이발 수술장이
피 안 묻히려는 의대 교수 대신 수술

불치병·역사 속 의학·의료 제도 등
‘영화 마니아’ 의사가 쓴 의학 이야기


코로나19사태로 주목받았던 영화 ‘감기’(2013)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코로나19사태로 주목받았던 영화 ‘감기’(2013)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의사가 아닌데도 해부학과 관련한 일화를 남긴 유명인들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체를 연구해서 근육이나 피부의 주름, 힘줄까지 자세히 그려놓았다. 인체 해부도나 근육과 뼈, 내부 장기를 그려놓은 그의 노트가 나중에 발견됐다. 이것이 일찍 알려졌다면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는 베살리우스가 아닌 다 빈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 역시 해부학에 조예가 깊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미켈란젤로’(2017)에서도 그가 해부하고 연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오랫동안 후원해 준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후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도망치듯 수도원 병원에 숨어 지냈는데, 그곳에서 시체를 구해다가 해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피부 주름, 근육, 힘줄, 인대, 핏줄이 아주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해부학적 지식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이 죽은 예수를 성모마리아가 안고 있는 ‘피에타’다.

이와는 달리 해부학 때문에 의사의 길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푸코의 진자’로 잘 알려진 레옹 푸코는 파리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피 공포증으로 해부학 실습을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 후 천체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린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진자의 흔들림을 통해 실험으로 증명하면서 천체물리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찰스 다윈도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박제술이나 해양 동물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실 다윈은 해부학 실습이 무서웠다기보다는 해부하려고 무덤에서 시신을 몰래 파내어 팔거나 살인까지 저지르는 추잡한 행위에 거부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2년 만에 의과대학을 그만두었고,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를 다녀온 후 <종의 기원>을 썼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의학의 세계>는 영화광 의사인 저자가 영화와 인문학을 넘나들며 의학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의학을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라 의학과 인간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활용한다. 일상에서 접하는 질병과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불치병, 역사 속의 의학 이야기, 의료 제도의 현 상황, 친숙한 의학 지식과 잘못된 의학 상식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룬다.

이 가운데 역사 속 의학 이야기가 흥미롭다. 중세에 이발사가 수술을 한 이유를 다룬 부분에 눈길이 간다. ‘피지션’(2013)은 중세 의학을 잘 보여주는 독일 영화다. 11세기 초 영국 런던에 사는 소년 롭의 어머니가 급성 충수염으로 보이는 병을 앓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롭은 어머니가 죽은 뒤 동생들과 헤어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이발 수술장이에게 거둬진다. 중세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의과대학이 설립된 후로는 정식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환자를 진료했다. 학생들은 졸업하면 닥터라는 칭호를 받았고, 주로 왕이나 귀족, 부유층을 진료했다. 그렇다 보니 유럽에서 의사들은 주로 도시에서 활동했고, 돈이 되지 않는 평민이나 빈곤층을 치료해서는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도시의 평민이나 시골 사람들은 이발사들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 이발사들은 간단한 처치나 의료 활동을 했기에 이발 수술장이로 불렸다. 정식 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은 대도시의 의과대학에서 시체를 해부하거나 수술이 필요할 때 불려 가서 칼을 잡았다. 의과대학 교수들이 손에 피를 묻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발사들은 도시 변두리나 시골을 돌아다니며 병을 고쳐주고 약을 팔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발 수술장이들은 도시에 정착해 이발이나 면도를 해주고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힘들게 수술장이와 겸업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이발사와 수술장이는 분리됐다. 아직도 이발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빨강·파랑·하양 띠가 돌아가는 표식을 영업소 앞에 설치해 두는 것은 예전에 이발 수술장이들인 수술을 겸했다는 증거다.

저자는 대규모 감염병을 다룬 한국 영화 ‘감기’(2013)가 코로나가 유행했던 상황을 짚어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영화는 컨테이너에 숨어 불법으로 입국하려던 외국인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한국에 유입되고, 변종 조류 인플루엔자로 의심되는 악성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상황을 그린다. 이를 막기 위해 정치권과 전문가가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 최초 전파 지역을 폐쇄하면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 96%의 국민이 지역 폐쇄를 지지하는 상황은 코로나19로 우리가 겪은 현실과 똑같다.

이처럼 저자는 의학 지식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담아냈다. 가깝고도 일상적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의학을 살펴보는 시도가 신선하다. 고병수 지음/바틀비/320쪽/1만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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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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