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진정한 사랑과 친절을 믿고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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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서울 강남, 한국의 부를 상징하는 지역
최근 새내기 교사의 죽음 안긴 ‘아이러니’
위기 극복의 묘안, 애정·배려 말곤 없어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들르곤 하는 식당이 있다. 자갈치시장 인근 밥집인데 고등어구이 정식 메뉴가 인기가 있는 집이다. 주인은 할머니다. 밥을 먹고 현금을 내밀면 정겹고 구수한 말투로 인사를 하지만, 카드를 내밀면 카운터 위에 수건으로 덮어 놓은 카드단말기를 꺼내 조심스레 전원 스위치를 켠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도 없이 손님을 돌려보낸다. 식당을 나서는 뒤통수가 간지럽게 구시렁거리는 볼멘소리는 덤이다.

이런 식당이 아직도 많다. 주로 오래된 식당일수록 그렇다. 오랜 장사 생활로 산전수전을 겪은 자갈치시장 일대 상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억척같은 ‘자갈치 아지매’를 연상한다. 자갈치 아지매 이미지는 분명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는 자갈치시장 일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자갈치는 부산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장소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었다. 이곳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쯤은 이제 누구라도 알고 있다. 부산이 곧 자갈치요, 자갈치가 곧 부산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교사가 교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임용된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교사였다. 이런 사건은 우리들에게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학교에서 가끔 벌어지는 선생님과 학생, 학부모가 관련된 각종 사건사고 소식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숱하게 들어왔다. 이번 사건처럼 과도한 업무나 학부모의 간섭 등으로 고통받는 교사들에 대한 소식은 슬픔을 넘어 숙연함까지 자아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현재 한국 교육현장 일선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잘살고 힘깨나 쓰는 학부모들이 밀집된 서울 서초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강남은 박정희 정권 때 본격적으로 개발된 지역이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위해 한남대교 남단과 양재 구간을 연결하는 건설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이 지역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둘째는 1971년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정치 자금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영동지구 개발로 1980년대에 이르러 원주민들이 쫓겨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외지에서 온 엘리트 계층이 대거 몰려들면서 어느새 이 지역은 서울에서도 부자들을 대표하는 동네가 된 셈이다.

다시 자갈치시장으로 가 보자. 자갈치시장은 부산항 남항이 끼고 있는 수산시장이다. ‘자갈치’라는 명칭은 예전부터 바닥에 자갈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매축공사에 따라 지금은 매립되고 사라진 당시의 용미산을 기준으로 자갈치시장 남쪽은 남항, 북쪽은 북항이 된다. 1931년에 시작된 남항 매축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은 전관 거류지 일본인이 이용하는 ‘남빈 해수욕장’이었고, 대대적인 매축공사 이후 시가지가 확장된 지역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렀다. 부산항 제1부두에 있던 부산공동어시장이 현재 자리로 옮겨 오면서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을 잇는 거대한 수산시장 벨트가 자리 잡았다.

한 교사의 죽음과 재래시장 인근 식당 주인의 불친절한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서로 교차했다. 한쪽은 불합리하고 편견으로 가득 찬 한국 교육의 실상을 상징하고, 다른 한쪽은 조그만 이익 때문에 상실해 가는 상거래의 도의(道義)를 실감 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곤 하는데, 그건 ‘식자층’일수록 더 그런 듯하다. 자본주의는 분명 안 좋은 사회 시스템이지만 개인의 주관과 감정을 배제하고 정확한 거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이념과 체계’이다. ‘냉혹한 자본주의의 세계’란 말을 자주 입에 담듯이, 자본주의는 이익과 손실이라는 철저한 셈법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체계다. 주는 게 있으면 반드시 돌려받는 게 생기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자본주의’는 현실의 교육 시스템이 야기하는 문제나 상인의 부도덕한 상술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체계를 떠나 형성된 인간 윤리의 말살과 훼손이 어디서부터 작동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개인의 성품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리 현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특정한 행위를 두고 그 원인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환원주의’다.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있을 것 같진 않다.

자기 성찰이 실종된 시대에 앞서 말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진정한 사랑과 친절, 이 두 낱말이 위의 사례를 상기하면서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뻔한 도출이라 식상하겠지만, 아직도 나는 이 두 단어가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묘안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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