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희망고문' 거짓말 못지않은 잔인한 행동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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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공공기관 2차 이전 연기 비수도권 허탈
여야, 총선 실익 계산 핑계는 ‘지역 갈등’
부산·경남 행정통합도 말잔치 전철 우려
간절한 마음 이용한 이기적 행태 안 돼야

요즘 부산과 경남지역 주민들은 정치인의 ‘말 둘러대기’에 진절머리가 난다.

정부의 공공기관 2차 이전 연기 발언은 물론, 임기 내 추진하겠다던 부산·경남 행정통합도 흐지부지 뭉개는 현실이 그 사례다. 정부가 지난 7월 초 수도권 공공기관 300여 곳을 지방으로 옮기는 공공기관 2차 이전계획을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고 공식 언급하면서 부산과 경남을 비롯한 비수도권에선 후폭풍이 거세다. 윤석열 정부는 올 상반기 중으로 관련 계획을 공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이전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이번 발표한 하반기 정책 방향에서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부산·경남에선 “지방시대 공약 이행 의지가 과연 있느냐”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지방시대’를 국정과제로 천명한 윤 정부도 전임 문재인 정부의 ‘희망고문’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공공기관 2차 이전 문제는 지난 정권에서도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다. 안될 것 같으면 안 된다고 분명히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정치인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노력해 보자’, ‘알아보자’, ‘장기과제로 추진해 보자’는 등의 희망섞인 말 둘러대기로 진실을 가린다. 문 정부 5년 내내 부산·울산·경남을 비롯한 비수도권은 노무현 정부의 1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후속 작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민들은 적잖은 희망고문을 겪었다. 2018년 문 전 대통령이 공공기관 2차 이전을 준비하겠다는 선언적 발언을 하고, 이어 이해찬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추가 이전 관련 용역결과가 곧 나올 것이라고 밝히면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당시 이 대표는 4·15 총선 이후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을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지방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민주당이 총선에 압승한 이후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과정에 더욱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앞뒤가 다른 정치인의 궤변이다. 현 정부와 여야는 공공기관 2차 이전이 내년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실익’ 계산에만 집중하고, 정작 핑계는 공공기관 이전을 목말라하는 지역에 둘러대고 있다. 공공기관을 서로 유치하려는 ‘지역간 갈등’ 때문에 이전 계획 발표가 연기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공공기관 2차 이전 이슈가 내년 총선과 연결되다 보니 지역에선 전 정부 때 악용됐던 희망고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부산·경남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부산시와 경남도는 최근 부산·경남 행정통합에 대한 시도민 의견을 물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5~6월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는 부산과 경남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 남녀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조사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사 결과 행정통합 논의를 ‘들어본 적 없다’는 응답이 69.4%로 ‘들어본 적 있다’는 응답(30.6%)보다 배 이상 많았다. 행정통합에 대해서는 찬성 35.6%, 반대 45.6%로 반대 응답자가 10%포인트 더 많았다. 반대 응답은 경남 거주자(48.5%)가 부산 거주자(42.8%)보다 많았다. 앞선 토론회에서도 행정통합의 효과를 균형발전으로 들고 있지만, 통합될 경우 서부경남과 부산권 격차가 더 심화될 것으로 지적됐다. 토론회와 여론조사 모두 부정적 요소가 많아 행정통합은 여론조사결과 발표를 기점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부산시와 경남도는 포기가 아닌 계속 추진 여지를 남겼다. 시·도는 “민관이 참여하는 행정통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공론화를 더욱 강화하고, 여건이 무르익으면 추후 여론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토대로 시도민 의사를 확인해 나간다”고 발표했다. 행간을 보면, 포기도 아니면서 강력한 추진도 아니다. 추진동력은 잃었지만 ‘불씨만 살려두고 보자’는 식이다. 그 의도가 뭘까?

민선 8기에 당선된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동남권 메가시티를 추진하기 위해 만들었던 부울경특별연합을 무산시키고, 대안으로 제시한 행정통합마저 좌초될 경우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민주당은 “박 지사가 공언한 ‘4년 내 행정통합 달성’은 불가능하다”면서 “본인 임기 내 행정통합도 못하고 그 징검다리 역할인 특별연합도 싫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반발하고 있다. 시·도의 행보는 행정통합 무산에 대한 책임은 피하면서 상대방에겐 조금의 희망을 갖게하는 또 다른 방식의 희망고문이나 다름없다. 일부 정치인들은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비수도권이 기대하는 공공기관 2차 이전 연기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있다. 만약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대방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이기적이고 비겁한 갑질이다. 거짓말 못지않은 잔인한 행동이다.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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