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과 침략의 역사에 남겨진 슬픔 그리고 희망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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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김상근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는 지중해 최대 섬이다. 이탈리아반도와는 3km, 남쪽 몰타와는 93km, 북아프리카와는 160km 정도 거리에 놓여 있다. 1787년 시칠리아를 처음 찾은 괴테는 이 섬을 “모든 섬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시칠리아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진출을 시도했던 세력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중간 교두보였다. 로마의 아이네이아스는 시칠리아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킨 다음, 이탈리아반도로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허스키 작전은 미국과 영국의 군대가 경쟁적으로 시칠리아에 상륙했던 작전으로, 당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반도로 진격하기 위한 연합군의 징검다리였다.

이처럼 이 섬의 역사는 다사다난했다. 지중해의 곡물 창고이자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온 시칠리아는 2800년 동안 끊임없는 수탈과 침략을 겪어야 했다. 시칠리아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거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800년경 시칠리아에 처음 식민지를 개척한 페니키아인들에 이어 그리스, 로마, 이슬람,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14개의 민족, 국가, 왕조, 군대가 차례로 찾아와 그 땅을 유린하고 약탈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잔인한 참주가 공포 정치를 펼쳤고, 10세기에는 이슬람 문명의 지배로 새로운 종교에 적응해야 했다.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법치를 도입하고 근대 국가의 발판을 놓았지만, 곧 프랑스 카페 왕조가 달려와 중세 봉건 제도로 되돌려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국과 추축국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각국의 군화가 발자국을 남기고 떠날 때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칠리아 주민들이 입을 뿐이었다.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수없이 짓밟힌 땅인 시칠리아에 남겨진 슬픔과 희망의 역사를 소개한다.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인 저자는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시칠리아에는 문명의 지층이 포개진 것이 아니라 한숨이 쌓였고, 그 슬픔의 땅 위에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눈물이 뿌려졌다”고 말한다.

이런 아픔의 역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점은 170년간 이어진 사라센의 시칠리아 통치(902~1072년)이다. 저자는 책에서 사라센을 시칠리아에 거주했던 모든 이슬람 신앙의 신봉자로 정의한다. 아랍인과 무어인, 그리고 베르베르인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명의 진수를 수용하고 발전시킨 사라센의 특별한 감수성으로 인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슬람 문명이 시칠리아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사라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오히려 사라센의 새 종교를 환영했고, 개종자도 나왔다. 동로마 제국 통치 시절에 부과되었던 가혹한 세금을 경감시킨 것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사라센 통치가 시칠리아에 남긴 문화적 흔적은 식문화에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우선 파스타가 처음 소개돼 시칠리아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또 쌀, 멜론, 가지, 설탕, 바나나, 건포도, 피스타치오, 면화 등도 유입돼 시칠리아의 식문화를 바꿔놓았다. 중세 향신료 무역을 주도했던 아랍인들이 시칠리아 식탁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사라센이 시칠리아의 농촌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12세기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라틴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정교회, 이슬람 신앙을 융합했던 노르만의 개방성 덕분에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곡물 창고에서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시칠리아 어부의 표지 사진이 자꾸만 떠오른다. 경계하는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우선 보이지만 깊게 팬 주름마다 용기와 강인함이 서려 있다. 공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다. 이 어부의 얼굴이야말로 2800년간 체념과 희망 사이를 오갔던 시칠리아 사람들의 상징적 모습이리라. 김상근 지음/김도근 사진/시공사/388쪽/2만 30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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