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술맛이 이랬을까…고문헌서 복원해 낸 '석술' [술도락 맛홀릭] <16>
[술도락 맛홀릭] <16> 미리내협동조합 '석술'
부산역 인근 작은 양조장 '미리내협동조합'에서 최근 출시한 '석술'. 조선시대 고문헌 <양조방>에서 복원해낸 술이다.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그 옛날 선조들이 마시던 술은 어떤 맛이었을까. 옛 술의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뚝 끊겼지만, 다행히 술 만드는 방법을 담은 문헌들은 전해 내려온다. 그중 <양주방>에 등장하는 술 하나를 최근 부산에서 복원해 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름부터 생소한 ‘석술’. 정체가 궁금해 부산역 인근의 한 소규모 양조장을 찾았다.
■ 100년 만에 되살아난 ‘석술’
부산 동구 초량동 차이나타운. 부산화교소학교의 붉은 담벼락을 지나자 바로 옆 건물 벽면에 ‘미리내’란 조그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2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BAR)처럼 키 높은 테이블과 유리잔, 술병이 손님을 맞는다. 더 인상적인 건 공간 전체에 감도는 공기다. 과실향인듯 꽃향인듯 술 익는 내음이 코끝으로 은은하게 번져온다.
“술 한 잔 드릴까요?” 손승희 대표가 손수 증류한 소주에 청귤을 넣은 하이볼 한 잔을 건넨다. 오후 늦더위가 시원하게 달아나는 맛이다. 술로 인사를 건네는 이곳은 ‘미리내협동조합’. 손 대표를 중심으로 40여 명의 조합원이 함께 꾸려 나가는 작은 양조장 겸 전통주 교육·체험 공간이다.
술병으로 가득 찬 선반 한가운데, 검은 병에 빨간 라벨의 술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올 4월 손 대표의 손길로 복원해 낸 ‘석술’이다. 손 대표가 석술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0년 전.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전통주 고문헌 수업을 듣다 <양주방>에 등장하는 ‘석술’에 꽂혔다고 한다.
미리내협동조합 입구에 들어서면 바(BAR) 같은 공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미리내협동조합 입구에 놓인 석술. 검은 병과 붉은 라벨이 눈에 띈다.
“빚는 방법이 굉장히 특이한 술인데, 인터넷을 찾아 보니 실제로 만든 사례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도전했는데 처음엔 실패했죠. 발효 타이밍을 잘 잡아서 결국 성공했는데 제가 만들어 본 술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이후 손 대표는 술빚기 교육 때마다 석술을 활용했다. 2015년부터 협동조합의 전신인 미리내우리술아카데미란 공간을 차려 수업을 시작했으니, 석술이 다시 세상에 나온 지 1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석술의 이력만큼 손 대표의 경력도 흥미롭다. 특급호텔 일식당에서 근무하던 그는 2010년 사케 소믈리에(키키자케시)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함께 사케를 배우던 이가 맛 보여 준 우리 술에 매료돼 ‘주(酒)님’을 바꿨다.
“자신이 만든 전통주를 한 번 맛보라고 주셨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사케랑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술이 더 우수하다는 생각이 들어 전통주 공부를 시작했죠.”
손 대표는 이듬해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전통주 동호회 공간을 마련했다. 매일 같이 술을 빚으며 한국전통주연구소·신라대·한국가양주연구소·국세청주류지원센터 등 국내 전통주 교육기관을 빠짐없이 돌며 술을 배웠다. 양조장 벽면 가득 내걸린 각종 수료증과 상장들이 손 대표가 우리 술과 함께해 온 시간의 무게와 깊이를 짐작케 한다.
미리내협동조합 손승희 대표가 석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 대표가 10여 년간 전통주를 공부하며 받은 자격증과 상장들.
■ 적당히 삭힌 쌀이 빚어낸 ‘오묘함’
다시 세상의 빛을 본 석술은 어떻게 빚는 걸까. <양주방>에는 삭힌 술이라고 나오는데, 말 그대로 쌀을 삭히는 게 핵심이다. 먼저 쌀을 불린 뒤 체에 밭쳐 끓는 물을 붓는다. 체 아래로 빠진 물을 식혀 다시 쌀을 담근 뒤 하루이틀 정도 삭힌다. 삭힌 쌀은 고두밥으로 찌고, 물은 다시 끓인 뒤 누룩 가루와 함께 버무린다. 3~4주 발효시킨 뒤 맑은 부분만 걸러내면 석술의 완성이다.
“쌀을 적당히 삭히는 게 비결이에요. 과하면 썩어버리거든요. 페하(pH) 농도를 측정해 가장 적절한 상태를 체크합니다.”
손 대표는 술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적절히 기술의 힘을 빌린다. 석술의 맑은 빛깔도 기술 덕분이다. 광목천으로 걸러낸 뒤 필터로 한 번 더 여과한다. 대신 필터의 종이 맛이 나지 않도록 먼저 생수를 통과시켜 필터를 씻어 낸다.
손 대표는 물 끓이기에도 신경을 썼다. 물을 끓였다 식히기를 100번 반복해 임금님에게 냈다는 ‘백비탕’처럼, 술 빚기에 쓸 물을 오래도록 끓이고 또 끓인다.
석술 빚기 과정 중 하나로 물을 붓는 장면. 미리내협동조합 제공
발효가 끝난 뒤 저온 숙성 중인 석술. 짙붉은 빛이 감돌지만 병에 담으면 황금색을 띤다.
“고문헌에 나오는 그대로 전통주를 만들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본 틀은 유지하되 용량 등 지금과 기준이 다른 내용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하죠. 석술의 옛 맛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석술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21세기에 다시 태어난 미리내표 석술의 맛은 어떨까. 검은 병에서 유리잔으로 옮겨진 술은 은은한 황금빛을 뿜어낸다. 향도 빛깔을 닮아 은은하다. 한 모금 입안으로 가져가자 언뜻 떠오른 단어는 ‘오묘함’이다. 산미와 단맛, 어느 하나 도드라지지 않은 가운데 여느 약주와는 다른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삭힌 쌀에서 나오는 특유의 맛일까. 여튼 새로운 약주를 만난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향미도 오묘하다. 술의 온도가 올라가자 향은 더 은은하고 맛도 부드럽게 다듬어진다. 알코올 도수 15도가 부담스러운 이들은, 상온으로 마시면 한층 부드러운 목 넘김을 느낄 수 있다.
석술을 유리잔에 따르면 은은한 향과 함께 황금빛을 뿜어낸다.
미리내협동조합 작업장에서 각자 술을 빚고 있는 회원들.
■ ‘미리내’, 전통주 꿈나무의 요람으로
석술은 약주인 만큼 기본적으로 한식과 두루 궁합이 맞다. 손 대표가 추천하는 요리는 나물류.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그림도 어울린다.
석술은 한두 달 저온 숙성을 거쳐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시판에 나섰다. 현재는 미리내협동조합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는데, 미리내 회원이 운영하는 경성대 앞 ‘조비량’에서도 석술을 만나 볼 수 있다. 조비량의 대표 안주는 해물파전과 오징어소면무침. 기장 쪽파와 오징어·새우가 들어간 해물파전은 눅눅하지 않고 바삭하다. 별로 기름지지 않은 데다, 석술이 기름기를 잡아줘 식사를 겸해 즐기기 좋다.
오징어소면무침의 매콤새콤한 맛도 석술과 조화를 이룬다. 주인장이 손수 만든 식초와 특제 양념으로 버무렸는데, 바닥에 깔린 무의 아삭한 식감도 재밌다. 좀 더 진하게 술을 즐기고 싶다면 부산에선 만나기 힘든 홍어전도 추천한다. 홍어회 못지않은 톡 쏘는 맛에 절로 술을 찾게 된다.
미리내협동조합은 은은하게 이름을 알리며 다음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 손 대표가 신경 쓰는 건 자가 누룩이다. 양조장 위층 공간 한편에서 토종 앉은키밀로 누룩을 띄우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이 토종 앉은키밀을 활용해 만들고 있는 자가 누룩.
미리내협동조합 한편에 전시된 각종 누룩과 입국, 곡물들. 전통주 교육용으로 쓰이는 실물 교재다.
“직접 만든 누룩으로 술을 빚었을 때 제일 술맛이 좋더라고요. 여건이 된다면 내년쯤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누룩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갖추고 싶습니다.”
석술과 전통주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바(BAR)도 운영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손 대표가 가장 애착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전통주 교육이다. 우리 술 체험, 원데이클래스 등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쉼 없이 운영해, 지난 10년 동안 미리내를 거쳐간 교육생만 수백 명에 이른다.
“술을 배우러 서울을 오가느라 많은 불편함을 겪었는데,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부산에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 술을 알리기 위해선 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교육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리내는 올해 초 ‘미리내 전통주 마스터’ 자격증 발급기관이 됐다. 8주 동안 강의를 들은 뒤 필기와 실기 시험까지 합격해야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다. 전통주 전문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가까운 부산에서 도전해 볼 만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석술과 함께 맛볼 수 있는 '조비량'의 오징어소면무침과 해물파전.
석술과 잘 어울리는 '조비량'의 홍어전.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맛도 향도 깔끔하다. 약주답게 약간의 점성이 있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듯, 묵직함이 느껴진다.”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약주 치고는 향이 덜한 반면 쌀의 단맛은 꽤 있는 편이다. 냉면이나 맑은 국물류와 어울릴 것 같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전형적인 약주의 향과 맛이다. 치즈·크래커류와 어울릴 듯. 독하지 않아 안주 없이 마셔도 괜찮겠다.”
▶이정 디지털미디어부 PD
“처음에 살짝 시큼한 향이 올라오다 금방 사라진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해, 맛있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독특하다. 기존에 만나보지 못한 특유의 향과 맛이 있다. 맑은술 하면 부드러운 질감에 은은한 곡류의 단맛을 떠올리지만, 이 술은 은근히 날이 서 있는 느낌이다. 버섯·이끼·두리안·호박·우린 차·연잎·나무 등의 향이 느껴지는데,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계열의 향이다. 혀를 쿡 눌러주는 듯한 곡물의 단맛과 감칠맛도 있으나, 쌉쌀함과 신맛이 어우러지다 후미에선 스파이시한 여운이 이어진다. 불려서 뜨거운 물을 붓고, 삭혀서 다시 찌고 하는 과정에서 특유의 날카로움이 생긴 것 같은데, 이 술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여러 차례 맛봐야 할 것 같다. 일반인들보다는 전통주를 어느 정도 맛본 분들에게 추천한다.”
-제품명 : 석술
-양조장 : 미리내협동조합(부산 동구)
-내용량 : 375mL
-알코올 : 15.0%
-원재료 : 정제수·쌀·누룩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