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에 부서진 삶, 치유하려면 가해자 지키는 악법 깨야 [MZ 편집국]
- 깊게 파인 ‘학폭’ 상처
드라마 더 글로리 현실판 주인공 표예림 씨
초·중·고 동급생 4명이 12년 간 괴롭혀
공소시효·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청원
고향 떠나 성인됐지만 우울증·수면장애
용기 내 가해자 고발해도 법적 처벌 한계
학교폭력 피해를 폭로해 현실판 ‘더 글로리’로 알려진 표예림 씨가 거울을 응시하고 있다. 표 씨는 학교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피해자가 성인이 된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최근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김종진 기자 kjj1761@
학교폭력 피해자들은 대개 주저하고 망설인다. 그간 피해를 방관해 왔던 학교나 경찰, 나아가 사회가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졸업하는 날까지만 참고 견디자’며 버티지만, 학폭 후유증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악몽처럼 덮쳐온다. 뒤늦게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가 다반사다. 피해자의 고통에는 정해진 시효가 없는데 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현실판 주인공으로 알려진 표예림(27) 씨는 학교폭력의 공소시효를 없애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부산 연제구에서 1인 미용실을 운영하는 표 씨는 초중고 12년간 동급생 가해자 4명에게서 괴롭힘을 당했던 학폭 피해자다.
경남 의령군에서 학창생활을 했던 표 씨는 2003~15년 장기간 학폭을 당했다. 표 씨의 주장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표 씨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화장실 변기통에 집어넣거나 몰래 신발에 압정을 넣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표 씨는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필사적으로 미용 기술을 배웠고, 지금은 미용 전문 기술도 남부럽지 않게 갖췄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학폭의 기억과 고통은 항상 표 씨를 괴롭힌다. 표 씨는 “우울증과 수면장애 등의 증상으로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가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표 씨가 방송매체, 유튜브, SNS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가해자들의 행위를 고발했지만, 응당한 법적 처벌 소식은 묘연하다. 바로 공소시효 때문이다. 형법상 공소시효는 폭행죄 5년, 상해죄 7년, 특수상해죄 10년이다.
표 씨의 경우 고등학교 2학년 때 책상 등으로 당했던 범행만 특수상해로 인정받아 공소시효 만료 전에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표 씨는 가해자 2명을 수사기관에 고소했고, 현재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상황이다.
표 씨는 학폭 공소시효와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 학폭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여지가 있는 조항을 폐지해 달라며 지난 4월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청원 9일 만에 5만 명 이상의 동의가 이뤄져 국회에 접수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던 법 개정은 지지부진해 시간만 잡아먹었다. 그러던 중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이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이달 초 발의했다. 상해, 폭행, 감금, 협박 등 중대한 범죄의 공소시효는 피해 학생이 성년에 달한 날부터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공소시효 개정안은 국회에 발의됐지만, 표 씨가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다. 표 씨는 “학폭 등 범죄에 대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또한 없어져야 한다”며 “피해자는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범죄가 돼 돌아온다면 사실상 피해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표 씨는 전국의 학폭 피해자와 연대한다. ‘나다움’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학폭 피해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했다. 표 씨는 궁극적으로 학폭 피해를 입은 이들이 상처를 치유받고, 사회로 진출할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표 씨는 “5분, 아니 5초만 용기를 낸다면 자신을 가두고 있던 작은 새장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했으니 많은 학폭 피해자도 순간의 작은 용기로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