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지방 사막화'와 영화적 상상력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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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홍 딛고 부산영화제 4일 개막
‘헬조선’ 다룬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지방소멸 위기의 ‘헬지방’ 떠올려
‘지방시대’ 선언 잇따르고 있지만
지역신문기금 등 줄줄이 삭감
‘지속가능한 지방’ 특단 조치 있어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기자회견이 4일 오후 부산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남동철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장건재 감독, 주종혁 배우, 김우겸 배우, 윤희영 프로듀서. 김종진 기자 kjj1761@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기자회견이 4일 오후 부산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남동철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장건재 감독, 주종혁 배우, 김우겸 배우, 윤희영 프로듀서. 김종진 기자 kjj1761@

부산은 다시 ‘영화의 바다’다. 그 바다에는 한때 ‘내홍’이라는 이름의 거친 풍랑이 일었지만 4일 오후 막 오른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순풍에 돛 단 듯 기분 좋게 영화의 밤바다로 출항했다. 부산이 낳은 스타 송강호가 ‘호스트’로 나서 세계 영화인들을 환대했고, 부산 시민들은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특유의 열정과 열광으로 영화제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늦은 밤까지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지킨 팔 할은 역시 관객이었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감독 장건재)는 ‘춥고 배고픈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의 방황을 그리면서도 ‘따뜻한 남쪽 뉴질랜드’를 향한 희망을 못내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이 싫어 떠난다지만 그 한국과 미지의 세계 뉴질랜드가 장면 장면 교차하면서 그늘과 빛이라는 영상미학을 완성해 나갔다. 보기에 따라 청년이 좌절하고 떠나는 어두운 현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도록 청년의 등을 떠미는 오늘의 ‘헬지방’과 오버랩됐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영화제 개막을 선언하면서 “영화는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며 “우리 삶의 주름과 굴곡, 빛과 찬란함을 한껏 느끼며 부산영화제가 여러분의 가을에 클라이맥스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릇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도 현실을 극단으로 비틀어 올린다는 점에서 매우 불온하고 위험하다. 현실이 영화 같고 또한 영화 같은 현실이 공공연한 데는 삶의 온기와 희망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다.

영화의 바다에 ‘헬조선’ ‘헬지방’이 클로즈업된 개막식 날 공교롭게도 부산에서는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했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국 17개 시도가 지방시대위원회를 앞다퉈 출범시키고 있는데, 부산시 지방시대위원회는 강원, 충남, 울산, 경남에 이어 전국에서 다섯 번째다. 정부는 각 지자체가 만든 지방시대 계획을 기초로 국가 차원의 종합계획을 마련한다고 한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지방시대 선포식’에서 “지역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며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방시대라는 말이 새삼 회자하는 것은 지방이 그만큼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지방시대에는 막장의 절박함이 묻어난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일상의 익숙한 단어가 된 지 오래이지만 위기감은 현저히 낮아졌다. 기초지자체가 인구 소멸에 대응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이란 게 있지만 별무소용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금이 10년간 매년 1조 원에 달하지만 지난해 전국 122개(광역 15개·기초 107개) 지자체에 배분된 7500억 원 가운데 집행률은 고작 37.6%에 그쳤다고 한다. 이러니 정부 정책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론계에서는 요즘 ‘뉴스 사막화’라는 말이 화두다. 지역언론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미국은 한때 ‘로컬 페이퍼의 천국’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20년간 2500개 가까운 로컬 페이퍼가 사라졌고, 인구 20% 이상이 지역언론이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매주 신문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미국은 공론장 부재에 따른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뉴스 사막화는 아직은 오지 않은 한국의 미래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지방소멸이 가속하는 상황에서 지방언론의 설 자리가 갈수록 위태로운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방의 소멸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지방언론의 위기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언설에 불과하다. 국토의 12%쯤을 차지한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절반이 넘는 인구가 몰리면서 지방은 날로 고갈되어 바싹 타들어 가는 형국이라 뉴스 사막화보다는 지방 사막화가 발등의 불이다.

지역신문발전기금의 대폭 삭감은 지방소멸의 우울한 전조다. 2024년 지역신문발전기금 계획안을 분석한 결과 올해 82억 5100만 원에서 내년에는 72억 8200만 원으로 11.7%(9억 6900만 원)나 감액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획취재 지원, 지역민 참여 보도, 지역인재 인턴 프로그램, 소외계층 구독료 지원 등이 위축될 판이다. 긴축재정 분위기 속에서 ‘지속가능한 저널리즘’이 속절없이 흔들리게 됐다.

지방의 영화제도 지속가능함이 화두로 떠올랐다. 올해 부산영화제 예산이 10% 정도 줄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맨 상황에서 지역 영화제를 지원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내년 예산이 기획재정부 심의과정에서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방과 지방의 문화는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지속가능한 지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때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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