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영화 인생’ 정지영 감독 “공존과 배려 살아있는 따뜻한 사회되어야”
신작 ‘소년들’ 선보여
삼례슈퍼사건 모티브
“사회파 감독은 운명적”
정지영 감독이 영화 ‘소년들’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CJ ENM 제공
“이 세상엔 따뜻한 사람들도 많이 살아요. 그 마음을 살려주고 유지하는 게 국가와 권력의 중요한 역할이죠.”
영화 인생 40년. 정지영 감독(76)은 신작 ‘소년들’을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작품은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발생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데, 힘 있는 권력자에 맞선 소시민의 연대를 보여줘 눈길을 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영화의 매력에 빠져 한길을 걸어왔다”며 “사회를 허무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인데 영화를 하면서 그걸 극복하고 있다”고 환하게 웃었다.
1982년 충무로에 데뷔한 정 감독은 어느 순간 ‘사회파 감독’으로 자리 잡으며 경찰, 카르텔, 모피아 등 국가 권력을 정조준해왔다. 대표작으로는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 1985’(2012), ‘블랙 머니’(2019) 등이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한 부조리함과 병폐를 비춘다.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문제를 방관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겨 온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정 감독은 “사회파 감독이 된 건 운명과 같다”고 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영화들은 선택이 안 되고 ‘소년들’ 같은 영화만 선택되는 거예요. 사실 멜로 영화를 만드는 건 자신이 없긴 해요. 운명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고 생각해요.(웃음)”
영화 ‘소년들’ 스틸 컷. CJ ENM 제공
삼례나라슈퍼사건은 전북 완주 삼례읍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한 사건이다. 이때 소년 세 명이 범인으로 붙잡혀 재판을 받았지만, 17년이 흐른 뒤 진범이 나타났다. 세 사람은 재심을 통해 최종 무죄를 받았다. ‘소년들’은 이 사건을 당시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던 한 형사의 시점에서 재구성했다. 정 감독은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사건이지만, 다시 들여다보자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정 감독은 “‘소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그들의 모습은 이 세상 또 다른 ‘소년들’의 고통과 힘없는 약자들의 처지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사회가 시간이 갈수록 ‘적자생존’과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어요. 저는 영화를 통해 그런 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아요. 공존과 배려가 살아있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정지영 감독이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소년들’로 극장 관객을 만나고 있다. CJ ENM 제공
정 감독은 여전히 ‘영화의 매력’에 빠져있다고 했다. 정 감독은 “전문직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 지면 계속할 수 있는 직업”이라며 “내게 기회가 왔고, 운이 좋아서 이렇게 올 수 있었다”고 겸손한 말을 했다. 그는 “영화를 하면서 다른 걸 해보려고 생각한 적은 없다”며 “영화를 하고 싶어서 대학 강단에 서는 걸 고사한 적도 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점도 좋다”고 했다. “전 대중영화 감독이에요. 일부 지식인이나 영화광들에게만 사랑받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죠. 많은 관객이 제 영화를 보고 떠들고 토론했으면 좋겠어요.”
정지영 감독은 차기작으로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다. 그는 “4.3평화재단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인데, 아이디어 하나가 빛나서 그걸 발전시켰다”며 “4.3사건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라는 점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마침 내가 다루지 않았던 해방 공간 직후의 이야기라서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관객이 나를 버릴 때까지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