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선원 해외 취업 60주년' 지금부터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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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한국해양대 항해융합학부 대학원 해양역사문화전공 교수

1960년대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30% 내외로 대학생 수는 10만 명 정도였고, 대졸 취업률은 50%가량 됐다. 이는 해양 관련 대학도 비슷한데 1962년과 1963년 한국해양대 졸업생 취업률은 50%였다. 그러나 이 두 해를 제외하면 상황은 좋지 않다. 앞서 2년을 제외하곤 1955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해양대 취업률은 대략 5%에 지나지 않았다. 취업하지 못한 항해과 졸업생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거나, 기관과 졸업생은 목욕탕 등에서 일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항해과 졸업생을 ‘지게꾼’, 기관과 졸업생을 ‘보일러쟁이’라는 자조적인 말로 부르기도 했다. 1965년 6월엔 선장 39명, 기관장 20명 등 갑종 해기사 144명이 실업 상태였다. 당시 해양 분야 고등교육기관의 경우 수업료는 면제됐고 제복비, 기숙사비 등은 국비로 지원되고 있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양성한 고급 해기 인력인 해양 분야 대졸자들이 실업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적 재원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4년부터 우리나라 선원 외국 나가

국내 해사 산업 고도화·선진화에 기여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1세대 선원

자료 수집·정리해 기념관 건립해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반전도 있었다. 협성해운(설립자 고 왕상은)이 홍콩의 풍성선무(豊誠船務)에 한국 선원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게 1964년이었다. 협성해운은 해외 선주사에 우리나라 선원을 처음으로 공급하는 만큼 대한해기원협회(현 한국해기사협회)에 가장 우수한 해기사를 선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협회는 당시 한국해양대 교수로 있던 김기현을 선장으로 초빙해 1항해사와 기사, 기관장 등을 선임토록 하고, 2, 3항해사·기사는 시험을 쳐 선발했다. 이렇게 모인 김 선장과 이상래 기관장 등 28명의 선원이 1964년 2월 10일, 2700톤급 룽화(Loong Wha)호에 승선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선원의 해외 취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최초의 일이다.

김기현 선장이 교수직을 버리고 해외 취업선 선장으로 이직하게 된 데는 높은 급여 때문이었다. 당시 국적선 선장 월급은 1만 9000원 정도였지만, 룽화호 선장 월급은 7만 원 정도로 3.5배가량 많았다. 한국 선원의 저렴한 인건비와 근면·성실함을 확인한 일본과 미국의 대형 선사들이 잇달아 한국 선원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선원의 해외 취업에 앞서 간호 인력과 광부들의 독일 취업이 먼저 이루어졌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만 8000여 명의 광부와 간호 인력이 파독 근로자란 이름으로 파견됐다. 파독 근로자들은 14년간 총 1억 15만 달러의 외화를 국내로 송금했다. 이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려 파독근로자기념관(서울), 파독전시관(남해), 파독광부기념관(태백) 등이 마련됐다. 1965년 10월 6일, 국내 잉여 인력을 해외에 진출시킴으로써 실업자 감소, 인구 증가 억제, 외화 획득, 교역 증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세계 속에 한국을 심자’는 기치를 내걸고 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었다. 선원 해외 송출 업무는 1966년부터 한국선원해외진출진흥회가 도맡아 하다 해외개발공사 설립 뒤인 1966년 12월 15일에는 공사로 업무가 이양되었다. 해외개발공사는 이후 한국해외개발공사를 거쳐 1991년 현재의 한국국제협력단(KOICA)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외 취업 선원들은 1965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82억 6178만 1343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지금도 해외 선주의 선박에 승선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해외 취업 선원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제조업의 평균이익률을 10%로 가정할 경우 820억 달러 상당의 수출액과 맞먹는 금액이다. 해외 취업 선원들은 또한 해외 선주의 다양한 최신 선박에 승선해 선박 운항 기술을 습득해 왔을 뿐만 아니라, 국적선사들이 초기 자본을 확보하고,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을 통해 국적 선대를 확충할 수 있는 인적 자본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나아가 선원선박관리업, 선박대리점업, 선용품공급업, 선박수리업과 조선업 등 해사 산업의 고도화와 선진화에도 기여했다. 미국의 대형 선사 라스코와 MOC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국내 조선소에서 34척의 선박을 새로 만들고 90척의 선박을 수리했다.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 해사 산업은 해운 세계 6~7위, 조선 1~2위, 항만 7위 등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제 2024년 2월이면 우리나라 선원이 해외 취업에 나선 지 60주년이 된다. 사람에게도 60주년은 환갑에 해당하는 의미 있는 해로 여겨지고 있다. 1세대 해외 취업 선원들이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해외 취업 선원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해외 취업 6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마도로스기념관을 건립했으면 한다. 이것이 그들이 우리나라 해사 산업과 국민 경제에 기여한 바를 기리고 기억하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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