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사랑의 여러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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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로맨틱 코미디 전형 벗어나
전쟁 만연한 일상 속
사랑, 연대, 희망 노래해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배급사 찬란 제공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컷. 배급사 찬란 제공

굳이 영화의 장르를 따진다면 ‘로맨틱 코미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는 아름답고 멋진 배우도 없고, 그 흔한 ‘사랑해’라는 대사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로맨틱 코미디와 어울리는 낭만적인 풍경이 아닌 쓸쓸하고 황량한 도시 헬싱키를 배경으로 외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달달한 사랑 영화는 아니지만, ‘안사’와 ‘홀라파’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를 보며 사랑이란 이런 모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의 첫 부분은 ‘안사’와 ‘홀라파’ 두 사람이 놓인 상황을 각각 보여준다. 먼저 마트에서 일하는 여자 안사가 표정 없는 얼굴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한 남자가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안사를 감시하고 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안사가 라디오를 켠다. 대사가 없던 영화에서 처음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의 전쟁을 보도하는 뉴스 소리이다. 그리고 다음날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물을 가져가는 것을 들켜 마트에서 해고당한다.

다음으로 카메라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노동자 ‘홀라파’의 뒤를 따른다. 홀라파의 일상도 안사처럼 무료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담배와 술, 노동의 반복 끝에 침대 하나 놓인 공동숙소로 돌아와 몸을 눕힌다. 홀라파 또한 전쟁 뉴스가 보도되는 라디오를 배경음 삼아 잡지를 읽는다. 두 사람은 타국의 전쟁을 끊임없이 듣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반복되는 뉴스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롭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또한 전쟁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안사는 해고를 당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몇 군데의 일자리를 전전하다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자리를 얻게 되고, 홀라파는 술 문제로 일자리를 잃고 힘든 상황에 빠진다. 세계의 바깥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전쟁 같은 일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친구와 함께 간 클럽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나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헤어진다. 이후 우연히 다시 만나면서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함께 보는 영화가 짐 자무쉬의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라니 묘하다. 좀비물을 집중해서 보는 모습에선 실소가 터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누는 짧은 대사들은 너무나 진지해서 유머러스하다. 1980년대가 배경일 것 같은데 벽에는 2024년 달력이 떡하니 걸려 있는 것도 그렇다. 핸드폰이 없어서 집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주는 아날로그적 방식은 낯설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수긍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부리는 마법이 아닐까.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2017년 ‘희망의 건너편’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2023년 복귀했다. 감독은 이 영화에 관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시달리던 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고 말하며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죽음 등이 담긴 영화라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마음이며, 위로를 건네는 말 한마디임을 영화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뿐만 아니라, 안사가 해고될 때 그 곁에서 그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하던 동료들과 홀라파가 데이트를 나갈 때 자신의 옷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낙엽이 지고 이제 날은 더 추워지겠지만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과 공동체임을 전한다. 그래서 안사와 홀라파가 낙엽이 휘날리는 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더없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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