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먼저 맞은 편안함, 기다리는 불안함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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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상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세계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
보안법 스캔들로 5조 원대 벌금 내
불안감 사라지니 시장 상승세로 전환
악재 털어내면 오히려 호재가 될 수도

도대체 얼마를 벌면, 5조 원이 넘는 벌금을 낼 수 있을까.

‘바이낸스’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자산 거래소가 있다. 잘 나가던 이 거래소는 지난해 미국 정부에 덜미가 잡혔다. 바이낸스가 은행보안법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테러 단체 자금 세탁 등을 결과적으로 도와준 혐의가 포착됐다. 결국 바이낸스는 혐의를 인정하고, 지난해 11월 21일(현지 시각) 벌금을 내는 것으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다.

합의된 벌금 규모가 43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5조 5000억 원 정도다. 4만 원짜리 주차위반 과태료에도 벌벌 떠는 입장에선, 조 단위의 벌금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참고로 2022년 바이낸스 하루 거래량은 650억 달러(약 84조 원) 정도였다고 한다.

바이낸스 사태는 변동성이 큰 가상자산 시장에서 악재 중 악재였다. 세계 최대 자산거래소가 테러 단체 등에 얽혀 천문학적인 벌금을 낸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대다수 코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락했다.

그러나 딱 하루였다. 다음 날 거래가는 반등해 곧 회복됐다. 오히려 이후 한 달 가까이 상승세가 이어져, 지금 비트코인은 6000만 원 안팎에서 거래된다. 벌금 합의 전과 비교해 보면, 1000만 원 정도 오른 셈이다. 예상과 다른 전개를 두고 업계는 ‘시장 불안감 해소’를 이유로 분석했다. 폭탄이 터지기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빨리 폭탄을 터트리는 게 낫다는 거다.

20세기 학창 시절을 보낸 남성들 중에는, 폭탄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게 어떤 고통인지 직접 경험해 본 이들이 꽤 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시절 중고등학교에선 선생님의 ‘단체 매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체 매질 앞둔 학생들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갈등을 한다. 먼저 맞는 게 속 편할까, 늦게 맞는 게 유리할까.

확실한 것은 늦게 맞을 고통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거다. 한 명, 한 명 차례가 다가올수록 겁이 나고 먼저 맞은 친구들이 부러워진다. 경험에 의하면 매를 든 선생님도 힘을 분배하는 요령이 있어, 늦게 맞는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어차피 터질 일을 계속 미루는 걸 ‘폭탄 돌리기’라고 표현한다. 나랏일에서도 폭탄 돌리기 행태가 종종 보인다. 어느 공무원이 굳이 자신의 임기 중에 혹은 타 부서로 이동이 있기 전에 폭탄이 터지기를 바라겠는가.

최근 CNN은 “한국군의 새로운 적은 저출산”이라는 보도를 했다. 인구가 줄어 2040년 즈음엔 현재 군 체계에서 필요한 최소 군인도 모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인구 감소는 확정된 사실이다. 대안은 병사 수가 아닌 첨단 기술 중심으로 국방 체계를 바꾸는 거다. 하지만 예민한 징집 체계를 손질하는 건 정부나 정치권 입장에선 상당히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현 체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대응을 서두르는 게 좋지만, 아마도 폭탄에 불이 붙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그제야 부랴부랴 움직일 것 같다.

기업 안에서도 힘들고 괴로운 건 일단 미루고 보는 일이 종종 있다. 특히 시장의 프레임이 크게 바뀔 때, 늦게 움직인 결과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시장 변화가 감지되면, 기업도 현재의 경영 방식이나 생산 체계의 한계를 인정하고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변화는 비용이 필요하고 기존 체계에 익숙한 이들의 저항도 불러온다. 이런 고통이 두려워 혁신을 미루다 보면, 결국 더 큰 고통의 시간이 올 수 있다.

현대차가 이달부터 디젤과 CNG 주력 버스 모델 4종 생산을 중단한다. 이로써 국내 버스 생산 체계는 친환경 저상버스에 온전히 집중하게 됐다. 하지만 버스 생산 업계의 전환 속도에 아쉬움을 지적하는 평가도 많다. 이제 디젤 버스는 사라지고 친환경 버스만 다니는 시대가 됐는데,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국내 대응은 시장의 변화에 느리게 반응했고, 그 틈을 중국 버스들이 파고들었다. 국내 신형 전기버스의 절반 가까이가 중국산이다. 물론 친환경 버스 생산을 위해 내연기관 버스를 접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시장 상황도 달라졌을 것이다.

나쁜 일이나 힘든 일은 미루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고, 조직의 습성이다. 이런 본성과 습성을 고려하면, 정부나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걱정만 하며 괜스레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일이 꽤 있을 것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요즘, 하기는 싫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을 찾아 빨리 마주쳐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보통의 경우 먼저 매를 맞으면, 고통의 시간은 짧아지고, 새출발은 빨라진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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