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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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1925~1980)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시집 〈싸락눈〉(1969) 중에서

설을 보낸다. 부모님이 그립다. 고향도 생각난다. 그러나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고향도 떠난 지 오래라 낯설다. 기억 속의 초가집 처마, 외양간, 섬돌, 마당귀 감나무, 아, 흰 눈을 소복이 담고 있던 댓잎, 그 대나무 울타리 밑에서 기침하던 아버지, 부엌 문간에서 그것을 내다보던 어머니, 왜 그것들이 더 푸르게 사무칠까? 갈수록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아지면서 애끓는 마음에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고, ‘고향 집 추녀밑 달빛’도 하염없이 쌓인다. 월백설백천지백의 환한 꿈길! 혼자 앓아누워 그리는 저 눈부신 정경!

이제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고향은 이미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이 되었고, 추억 속에서만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게 될 뿐이다. 영원한 이데아의 그림자가 된 고향, 이제 물속의 달처럼 그려볼 수는 있으나 만져 볼 수는 없게 된 것. 이것들을 느끼게 하는 ‘겨울밤’은 형벌인가, 축복인가!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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